중세 이래 한국사회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사회에 비해 국가가 비대하게 발달한 것을 꼽는데, 이것은 현대의 한국에도 해당된다 할 수 있다. 왕조시대의 중앙집권국가론, 식민지시대와 해방후의 과대성장국가론과 개발독재론, 권위주의국가론 등 모두 ‘강한 국가’의 성격을 반영한 주장들이다. 이들 모두 국가가 사회에 대해 우월적인 지위에 있을 뿐만 아니라, 국가권력이 중앙에 집중되어 있는 특성을 공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이 책은 이런 한국사회를 이해하는 주요한 열쇠인 국가 문제를 분석하기 위한 작업으로서 현대 국가의 역사적 연원이라 할 수 있는 식민지시대의 국가권력 문제를 다룬 것이다.
구체적으로 1930~40년대 조선총독부의 촌락지배를 정책과 기구, 촌락지도자, 그리고 촌락사회의 대응이라는 네 가지 차원에서 재구성하여 식민권력이 어떤 방식과 수준으로 촌락까지 침투해 들어갔으며, 이에 대한 촌락사회의 변화와 대응양상을 밝힘으로써 식민지기의 촌락상과 지도자상을 규명하는 것이 이 책의 목표라 할 수 있다.
■ 내용 소개
일제가 식민지 조선사회에 설치한 중앙권력은 강력한 무장력과 행정력을 통해 자신의 의지를 촌락까지 관철시키려는 정책과 제도를 구축하려 했으며, 이로 인해 촌락사회는 자본주의 상품화폐경제의 침투와 함께 전통적인 질서가 해체되거나 위협받음과 동시에 식민권력의 침투에 대응해야 했다. 식민지 조선 주민에게 있어 1930~40년대는 강력한 국가권력이 일상 속으로까지 침투해 들어와 각종 행정 요구와 동원에 시달리는 낯선 경험을 겪으면서 대응하는 시기였다. 대응은 거부와 수용, 변용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으며, 이는 식민권력이 촌락사회의 대응에 따라 불균등하게 침투해 들어갔음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비록 협소하고 제한된 공간이긴 하지만 촌락사회는 자치조직의 역량에 따라 식민권력에 대해 다양하게 대응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저자는 상대적으로 다른 식민지에 비해 고도로 발달한 조선총독부 중앙권력과 이에 대응해야만 하는 조선 촌락사회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식민지 사회를 재구성하였다.
저자는 책에서 식민지 조선사회의 실체 파악을 위해 다음의 네 가지를 규명하고 있다.
1. 조선총독부는 촌락을 어느 정도로 지배하고 있었는가(지배의 수준)
조선총독부는 1932년 농촌진흥운동을 시작하면서 갱생지도부락과 갱생지도농가를 지정하여 농가갱생계획을 수립한 뒤 행정력을 총동원하여 생산과 소비, 관습에 이르기까지 각종 지도를 통해 촌락으로 침투해 들어갔다. 그러나 중일전쟁이 장기화되자 1940년 농촌진흥운동을 농촌보국운동으로 전환하면서 농가갱생계획을 ‘부락(部落)’을 실행 단위로 ‘국가’ 요청에 따른 계획생산의 완수를 목표로 하는 부락생산확충계획으로 전환하였다. 이에 따라 계획을 수립하기 위한 주민의 경제실태 조사도 확대ㆍ강화되었다. ‘식민권력의 침투수준’을 보여주는 지표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주민조사는 ① 1911년의 우량면 조사, ② 1926년의 모범부락ㆍ단체 조사, ③ 1933년 갱생지도부락 선정을 위한 지도농가 조사(→1935년 갱생지도부락 내의 전체 농가 조사), ④ 1940년 모든 촌락의 생산확충계획 수립을 위한 모든 농가 조사라는 형태로 발전하여, 부락생산확충계획 단계에 이르면 전체 촌락의 97%, 전체 농가의 92.4%가 생산계획을 수립하게 된다. 전시체제라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만들어진 것이긴 하지만 조선총독부의 행정력이 전 조선의 농가경제를 개별호 단위로까지 파악하는 수준에 이르게 되었음을 뜻한다.
한편, 농촌진흥운동을 추진하면서 총독부는 개별농가의 경제를 직접 지도ㆍ관리하여 농가갱생을 달성한다는 방식을 선택했다. 가계부 지도로 상징되듯이 국가가 개별농가의 가정경제까지 관리하겠다는 이 발상은 개별호와 국가를 무매개적으로 연결시킨 천황제 국가주의의 통치이념을 농촌진흥운동에 적용해서 종국에는 동화주의(同化主義)를 완성시킨다는 이념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개별 농가의 행정지도는 막대한 행정력과 예산 확보를 필요로 했다. 조선총독부가 선택한 방법은 농촌진흥운동과 관련 없는 부서까지 총동원하여 농가지도에 투입하는 것이었으며, 말단의 행정 현장에서는 단체(촌락)지도와 개별지도를 병행하여 실행함으로써 위로부터의 요구에 대응했다.
2. 조선총독부는 어떤 경로를 통해 촌락에 침투해 들어갔는가(지배경로와 기구)
식민권력이 자신의 의지를 주민에게 관철시키는 경로는 크게 다섯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즉 ① 군과 경찰에 의한 물리적 지배, ② 조선총독부→도부읍면ㆍ정동(町洞)→주민으로 이어지는 행정적 지배, ③ 경제단체(농회, 금융조합, 산업조합)를 통한 경제적 지배, ④ 반관반민(半官半民)의 관제단체(유도회, 부락진흥회,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등)를 통한 사회적 지배, ⑤ 학교를 통한 이데올로기적 지배 등을 들 수 있다. 이 가운데 ①, ②, ③, ⑤는 식민지기 전 기간에 걸쳐 이루어졌으나 ④는 1930년대 후반 특히 1937년 중일전쟁 이후 두드러지게 강화되는 모습을 띤다. 촌락 수준에서 보면 ②, ③, ④의 지배기구들이 각각의 영역에서 운영되다가 1940년 10월 16일 국민총력조선연맹 결성을 계기로 통합되는 형태를 띤다.
농촌진흥운동 당시 가장 큰 비중을 갖고 추진된 것은 경제방면의 지도기구와 주민자치조직의 재편과 확대였다. 경제의 경우, 농촌진흥운동과 전시총동원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금융조합과 그 산하 조직인 식산계(殖産契)였다. 농촌진흥운동의 추진과 더불어 금융조합은 조합원의 자격을 빈농층에게까지 확대하여 1933~37년 총세대의 50%, 1938~42년 80%를 가입시킨다는 목표를 세웠다. 구매ㆍ판매사업까지 취급하게 된 금융조합은 식산계를 통해 촌락사회에 빠른 속도로 침투해 들어가 조선 농촌의 유통기구까지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
사회적 지배경로에서 특히 총독부가 주목한 것은 전통적인 촌락 내 자치질서를 변용하여 만든 농촌진흥회였다. 총독부는 농촌진흥회를 통해 국가관념 고취, 생산증대, 납세철저 등 ‘국가’적 요구를 관철시키고자 하였다. 1937년 당시 전체 촌락 가운데 50%의 조직률을 보인 진흥회를 모든 촌락으로 확대하는 한편, 촌락 내 모든 민호(民戶)의 가입을 의무화하고, 계나 산업조합 등 각종 산업조직을 농촌진흥회 산하로 통폐합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촌락 내 권력침투의 매개 역할을 한 농촌진흥회는 국민총력부락연맹의 설립으로 해소되지만 총독부가 촌락을 획일적으로 지배하는 체계를 만드는 데 기초를 제공하였다. 1943년을 전후해서는 구장(區長)과 부락연맹이사장, 그리고 식산계 주사(主事)를 한 인물로 통합함으로써 촌락 단위에서 행정과 경제, 그리고 사회적인 지배를 일원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체계를 형식상 완료했다.
3. 촌락사회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은 어떤 성격을 갖고 있었나(중심ㆍ중견인물)
1930년대 이후 주민 동원체제가 일상화됨에 따라 식민권력과 주민 사이를 매개하는 촌락지도자에 대한 문제가 중요한 정책 과제로 제기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식민통치의 효율을 위해 식민권력의 민간측 대리인(agent)이자 촌락을 대표하는 중심ㆍ중견인물을 발굴하거나 육성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40~50대의 경제적 능력과 영향력을 가진 중심인물은 총독부가 이상적으로 생각한 촌락지도자였으나 그 수가 많지 않았다. 따라서 총독부는 ‘충량한 황국농민’으로서 총독부의 농업정책을 밑에서부터 지탱해 줄 것으로 기대하는 20~30대의 중견인물을 육성하는 정책에 주력했다.
저자는 중심ㆍ중견인물의 실상을 밝히기 위해 800여 명의 인물사례를 조사한 결과, ‘지역유지형, 독농가형, 농장관리형, 사회운동가형, 중견청년형’으로 구분할 수 있었다. 지역유지형은 자산가로서 직접 농사개량사업과 지역 개발을 주도하면서 면(面)을 활동무대로 면장 등 각종 공직에도 진출하여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독농가형은 중농 정도의 경제적 능력을 갖추고 촌락 단위에서 구장 등을 맡아 행정을 대리했다. 지역유지형과 독농가형은 총독부가 상정한 중심인물의 전형이었다. 농장관리형은 식민지 지주제를 선도적으로 이끌었던 미곡단작지대의 농장에서 그 전형을 볼 수 있으며, 민족ㆍ사회운동을 하다가 농촌진흥운동으로 편입된 사회운동가형은 식민권력과 긴장관계를 유지하거나 깊숙하게 편입되어 들어간 두 경우가 있다. 총독부가 정책적으로 육성하려 했던 중견청년형은 중농의 자제로 촌락의 차기 중심인물로 성장할 조건을 가진 층과 빈농 출신으로 식민당국의 행정지원을 통해 갱생에 성공함으로써 다른 농가에 모범이 되기를 기대한 층이 있다. 중견인물을 대표하는 이들은 보통학교의 졸업생지도와 중견인물양성시설을 통해 집중적으로 육성되었으나, 조선총독부의 의도와는 달리 다수는 좀 더 나은 직업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양성시설을 활용하기도 했다.
4. 식민권력의 침투에 촌락은 어떻게 대응했으며 변했는가(촌락사회의 변화)
식민권력의 촌락 침투에 따른 촌락사회의 대응양상은 다양했다. 그 양상을 권력의 침투 정도와 촌락의 자율성을 기준으로 유형화한 결과, ‘농장형’과 ‘행정형(지도부락형과 사상통제형)’ ‘모범부락형’ ‘자율형’ ‘낙후형’으로 구분할 수 있었다. 농장형은 농업경영에서 소작인의 자율성이 사실상 부정되고 지주자본의 요구에 충실한 유형이다. 행정형은 집중적인 행정지도와 지원을 통해 농사개량을 추진한 지도부락형과 반일적 성향이 강한 촌락에 정책적인 지원을 통해 체제내로 수렴하려는 사상통제형으로 세분화될 수 있다. 모범부락형에는 주민의 자율성이 선행하고 행정지도ㆍ지원이 뒤따른 곳과 행정지도ㆍ지원이 선행하고 주민이 참여한 두 유형이 있으나, 행정의 지배와 주민의 자율이 상호 보완적으로 작용한 유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전시체제가 강화되어 가면서 행정의 요구가 주민의 자율을 압도함으로써 자율적인 공간은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자율형은 보수적인 자치질서가 발달하였거나 종교상의 목적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행정 침투력이 상대적으로 낮은 촌락에 해당한다. 반면 낙후형은 촌락의 경제적인 능력이 매우 취약해서 촌락의 자치력은 물론 행정력의 침투도 함께 낮은 유형이다.
식민권력의 촌락 침투는 주민의 자치조직에도 변화를 일으켰다. 식민지시대 주민의 자치조직은 전통적인 주민조직인 ‘동계형(洞契型)’과 총독부가 주도하여 설립한 관제자치단체인 ‘농촌진흥회형’, 그리고 두 유형 사이에 있는 ‘절충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동계가 전 주민이 참여하여 촌락의 공동사업을 수행하는 자치조직으로서 촌락공동체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면, 농촌진흥회는 식민국가의 요구를 촌락 단위에서 관철시키기 위한 관리기구로서 전통적인 자치조직을 활용한 의제공동체(擬制共同體)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 절충형에는 동계와 진흥회가 병존하거나 양자의 성격이 혼용된 조직들이 농촌사회에서 광범위하게 조직되어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곧 촌락 내에 형성된 ‘행정과 자치의 분화에 따른 이원구조’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일제의 식민지배로 촌락 내에 수립된 행정과 자치의 이원구조는 전시체제기로 들어가면서 관료제 질서가 강화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으며, 해방후에도 계속 이어지다가 1970년대 고도성장기 산업화와 더불어 해소되었다.
일제 식민지시대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와, 그것이 현대 한국에 남긴 유산들은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선 많은 논쟁들이 있어왔지만, 저항운동 일변도의 민족주의론이나 경제적 통계지표로서만 보려는 근대화론을 지양하면서 식민지시대를 살았던 사람들과 그들이 생활했던 공간과 사회상의 실체들을 규명하는 작업들은 이제 조금씩 진행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이런 작업의 일환이자 현대 한국마을의 변천과정을 거시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방법론을 제공한다는 면에서 주목된다 하겠다.
목차
서론
제1장 촌락 지배정책
1. 前史:1910~20년대의 우량면리ㆍ모범부락 조성 정책
2. 농촌진흥운동하의 지도부락 선정과 농민조직화 정책
3. 총력운동하의 촌락조직 정비와 일원적 지배체제의 수립
4. 지도방식을 둘러싼 정책 변화와 의미
제2장 촌락 지배기구
1. 식민권력의 촌락지배 경로와 기구
2. 전시기 지배기구의 정비와 일원적 지배체제의 구축
제3장 식민권력과 중견인물
1. 중견인물의 개념과 정책의 배경
2. 중견인물 육성정책과 교육내용
3. 중견인물 양성시설과 참가계층
4. 중심ㆍ중견인물의 유형과 성격
제4장 촌락사회의 변화
1. 이론적 모형:권력의 침투도와 자율성의 상관관계
2. 촌락의 유형과 실태
3. 촌락구성과 개발, 그리고 촌락질서의 변화
결론
참고문헌
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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