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으로서 조선의 미를 생각한다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다. 이를 기점으로 촉발된 독립만세운동을 일제는 무력으로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그리고 얼마 뒤, 『동아일보』에 한 일본인이 두 개의 글을 게재한다. 「조선인을 생각한다」와 「조선의 친구에게 보내는 글」이 바로 그것이다. 3ㆍ1운동과 일본인. 한국인이 이 두 단어를 듣고 떠올릴 수 있는 조합은 많지 않다. 그리고 그것은 대개 한 방향으로만 몰릴 것이다. 그러나 이 일본인이 쓴 글은 일반적인 예상과는 달리 일제의 무력 진압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이 글에는 조선에 대한 깊은 동정과, 폭력으로 조선의 독립운동을 진압하려고 하는 일본 관헌에 대한 비판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 이 글의 주인공이 바로 야나기 무네요시이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한국 공예품(조선시대 백자)과의 만남이 하나의 계기가 되어 ‘민예(=민중적 공예)’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냈다. 이 개념을 통해 그는 ‘민예운동’을 시작했고, 「조선인을 생각한다」를 시작으로 조선예술론을 전개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조선과 그 예술』 등의 책을 썼다. 그는 조선의 막사발 등을 두고 ‘무기교의 기교’, ‘비개성의 개성’이라고 찬양했으며, 총독부가 광화문을 철거하려고 했을 때 이를 안타까워하는 글을 발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또한 1921년에는 조선과 일본 사람들이 예술을 통해서 서로를 이해하고, 또 산실되는 조선의 예술품을 보호할 목적으로 아사카와 타쿠미와 함께 경성에 ‘조선민족미술관’을 설립하기로 계획하고, 이를 위해 그의 아내인 야나기 가네코는 조선에서 여러 차례 음악회를 열었다. 『동아일보』의 주최와 홍보 속에서 경성뿐 아니라 개성, 평양, 진남포 등 각 도시를 순회하며 열린 이 음악회는 성공을 거두었고, 그 결과 1924년 4월 9일, ‘조선민족미술관’이 개관했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조선민족미술관’의 설립 이념과 계획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항상 한 나라의 인정을 이해하려면 그 예술을 찾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일본과 조선의 관계가 긴박한 오늘날, 나는 이 점을 더욱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중략…) 그 예술을 좀 더 이해하게 된다면 일본은 따뜻한 조선의 벗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중략…) 나는 그러한 희망과 신념을 완수하기 위해 ‘조선민족미술관’ 설립을 드디어 계획했다.
일제 식민지지배를 생각하면 으레 일본의 일방적인 억압과 수탈, 탄압이 떠오르게 마련인데, 이렇게 ‘조선’을 ‘아끼고 사랑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의외일 수밖에 없다. ‘조선을 사랑한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에 대한 한국의 관심도 깊어 그의 대표작인 『조선과 그 예술』의 번역본은 지금까지 국내에서 8권이 출간되었으며 야나기 무네요시의 저작에 대한 평가ㆍ비판의 글도 다수 발표되고 있다. 야나기 무네요시에 대한 연구는 1961년 그가 세상을 떠난 이후 추도문과 기념 논문이 발표되면서 시작되었다. 그 중 주목되는 논문은 중국사 연구자였던 우부카타의 「일본인의 조선관-야나기 무네요시를 통해서」였다. 우부카타는 야나기 무네요시가 ‘독자의 문화와 전통을 가진 민족을 발견’한 것을 높이 평가했다. 야나기 무네요시의 긍정적인 면을 부각한 이 논문은 한동안 그에 대한 유일하고도 본격적인 글이었다.
조선의 친구 혹은
그러한 연구 상황을 바꾼 것은 한국의 젊은 시인 최하림이 1974년 발표한 「야나기 무네요시의 한국미술관에 대하여」이다. 최하림은 야나기 무네요시가 조선의 미를 ‘선의 미’, ‘비애의 미’라고 한 것을 비판하고, “야나기는 애정은 있었지만, 그 애정을 올바르게 활용한 사상은 없었다”라고 결말지었다. 이를 계기로 한국에서는 야나기 무네요시의 조선예술론이 일본에 의한 조선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논문까지 나왔다.
일견 ‘친한파’로 보이는 야나기 무네요시에 대한 비판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야나기 무네요시의 조선에 대한 우호적인 글이나 조선에서의 그의 활동들을 보면 이러한 주장은 어불성설로 보인다. 그러나 조선민족미술관을 설립하는 그의 기획이 조선인 청년의 지지를 받는 동시에 일본의 어용 신문인 『경성일보』나 『매일신보』 등에서도 협력을 얻었던 점, 야나기 무네요시의 민예운동이 1940년을 전후하여 전쟁체제를 정비하기 위한 일본의 신체제에 적극 협력한 점 등을 보면 야나기 무네요시에 대해 그리 쉽게 단정 지을 수만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야나기 무네요시의 조선의 ‘민예미’ 찬양은 사실은 자국인 ‘일본의 미’를 드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중국과 일본, 조선의 예술을 비교하면서 중국은 ‘대륙’으로 ‘위대한 힘에 어울리는 강함’을 가지고 있고, 일본은 ‘가련한 섬나라’이며 ‘일본인의 마음에 아름다움과 즐거움과 따뜻함이 흘러 넘친다’고 주장했다. 한편 조선은 ‘반도’라는 지리적 여건 때문에 조선의 ‘역사가 즐거움이 결여되어 있고, 강하지 못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운명이었’으며 ‘끊임없는 외래의 압박’에 의해 ‘사대주의를 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정의를 근거로 각국의 예술을 특징지으면서 조선에 대해 ‘비애의 예술’, ‘애상의 미’이며 ‘슬퍼하는 자’라고 말한 것이다. 또한 조선은 ‘이 세상의 실제에서 평안함을 얻을 수 없’다고 단정지으며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위로의 말을 전한다. ‘조선의 민족이여, 주어진 운명을 인내하라, 보이지 않는 나라에서 그 운명은 온기로 따뜻해질 것이다.’ 이러한 삼국의 대비를 통해 야나기 무네요시가 결정한 각 나라의 예술요소인 ‘중국=힘=형태’, ‘일본=즐거움=색’, ‘조선=슬픔=선’ 이라는 도식은 일본인의 일방적인 역사해석에 의해 생산된 것이며 일본 제국주의 언설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러한 대비의 궁극적인 목적은 조선과 일본을 차별화함으로써 일본이 가지는 고유한 특성을 밝히고, 독자적인 ‘일본의 미’를 강조하는 것이다. 『조선예술론』에서 그는 조선을 가엽게 여기며, 조선의 ‘슬픈 운명’을 주장한다. 슬픈 운명 때문에 조선이 일본과는 다른 미를 가질 수 있었고 이것이 바로 ‘비애의 미’이다. 이 때 야나기 무네요시가 본 ‘조선의 미’는 일본이라는 제국의 ‘지방’으로서의 그것에 불과하다. 야나기 무네요시가 조선민족미술관을 경성에 세우기로 결정한 배경에는 ‘사라져 가고 있는’ 조선 예술이 ‘비보편성’과 ‘지방성’을 지닌다는 의식이 깔려있었다. 이런 태도를 바탕으로 야나기 무네요시는 1950년대 ‘일본적인 것’을 강조하며 다른 나라의 미의식과 비교하여 ‘일본의 미’, ‘일본의 눈’의 우월함을 주장했다.
한국인의 자기찾기
‘조선을 사랑한 일본인’인가, ‘양의 탈을 쓴 일본 제국주의의 숨겨진 조력자’인가. 그가 가진 양면성 때문에 최하림의 글 이후 그에 대한 평가는 연구자에 따라, 또 시대 상황과 일본과의 관계에 따라 수시로 달라졌다. 최하림이 글을 발표할 당시, 일본에서도 많은 일본인이 조선에 대하여 무관심한 가운데에서도 조선에 관심을 가졌던 일본인의 역사를 발굴하는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일본의 다카하시 소지는 야나기 무네요시가 실제로 조선ㆍ조선인과 맺었던 관계에 중점을 둔 연구 논문을 발표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2000년 전후로 가토 리에, 가지야 타카시 등의 일본 연구자들에 의한 심층적인 연구들이 발표되기 시작했고, 이에 호응하듯 권석영, 이병진 등의 연구자들도 야나기 무네요시에 관한 다채로운 논문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새해의 시작과 함께 소명출판에서 펼쳐낸 『야나기 무네요시와 한국』(소명출판, 2012)은 이러한 다양한 연구를 한 데 모은 책이다. 본서는 한일 양국의 젊은 연구자들의 교류 속에서 탄생한 집단적인 성과이다. 야나기 무네요시 개인에 대한 연구만이 아니라, 야나기 무네요시와 조선ㆍ조선사람ㆍ조선예술계의 관계, 야나기 무네요시와 다른 일본 지식인ㆍ예술가와의 관계를 연구하고 비교함으로써 야나기 무네요시에 대한 단편적인 평가를 지양하고, 심도있는 연구로 나아갔다. 이러한 다채로운 연구를 통해 본서는 단순한 야나기 무네요시론을 넘어 ‘식민지기 일본 지식인의 조선 인식과 조선ㆍ조선예술과의 관계’에 대한 연구를 담았다.
야나기 무네요시의 한국 예술론이 한국에서 주목을 받아 온 것은 ‘자민족의 예술을 어떻게 자기평가하느냐’라는 불가피한 물음에 대해 그 해답을 찾아내고자 하는 한국인의 심리가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으로 하여금 이런 근원적인 것을 묻게 한 원인은 식민지 시대의 가혹한 문화탄압에 있다. 한국인은 빼앗겼던 자신들의 말을 되찾고 일제가 소홀히 한 교육을 다시 일으켜 일본인에 의해 일그러진 자신들의 역사를 다시 써야만 했다. 예술 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예술의 특질을 찾아내고 그것을 기술하는 것은 한국이라는 근대 국민국가의 성립을 지탱하는 정신적인 기둥이 될 수 있다. 한국인이 야나기 무네요시를 고찰하는 것은 단순히 논란의 인물을 직접 살펴보아 스스로 판단을 내리는 것을 넘어, 타자의 시선으로 본 ‘자기’를 통해 한국인 스스로 ‘자기찾기ㆍ자기평가’를 하는 길일 것이다.
목차
추천의 말 다카사키 소지
책머리에
한국인에 의한 야나기 무네요시 연구사 가토 리에
제1부 한국에서의 야나기 무네요시의 활동
제1장 경성의 음악회 가지야 타카시
─「조선민족미술관 설립후원 야나기 가네코의 음악회」의 여러 양상
제2장 시라카바미술관에서 조선민족미술관으로 가지야 타카시
제3장 아사카와 노리타카ㆍ타쿠미 형제의 조선 이해 이상진
─일제 식민지기의 형제의 조선전통공예연구를 중심으로
제2부 야나기 무네요시의 조선예술론
제1장 세키노 타다시의 조선미술사론과 야나기 무네요시의 조선미술사관 가지야 타카시
제2장 조선민족미술관과 Folk Art 구리타 쿠니에
─야나기 무네요시와 「상애(相愛)」의 사상
제3장 야나기 무네요시의 두 개의 관심 다케나카 히토시
─미, 사회, 그리고 조선
제4장 야나기 무네요시의 인간부재로서의 ‘민예’론 읽어보기 이병진
제5장 야나기 무네요시의 민예운동과 ‘내셔널리즘’ 신나경
─‘일본의 미’론을 중심으로
제3부 한국에 수용된 야나기 무네요시
제1장 3ㆍ1독립운동 후의 조선 예술계와 야나기 무네요시 『조선과 그 예술』을 둘러싼 시론
가토 리에/박승주 역
제2장 사상의 변용과 예술적 공명, 『폐허』 동인과 야나기 무네요시 조윤정
제3장 광화문ㆍ해태를 둘러싼 담론과 야나기 무네요시 권석영
역자 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