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일본정신분석에 관한 가라타니 고진과 박규태의 연구를 참조하여 식민지조선의 지식인들이 ‘조선적인 것’의 상징계를 구축해나가는 과정을 추적한 것이다. 가라타니는 음독과 훈독에 착안하여 일본에서는 상징계로의 진입에 필요한 거세가 배제되었다고 논하고 그 특징을 모토오리 노리나가의 ‘모노노아와레’에서 찾는다. 한편 세계제국 중국과 가까운 위치에 있었던 조선은 중국보다도 더욱 강력한 거세와 억압을 추진했다고 한다. 다만 조선은 근대 이후 제국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고, 이때 국민국가라는 상징질서 구축을 위한 거세가 배제되었던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박규태는 모노노아와레를 라캉 이론의 대상a에 빗대어 설명하고 타자와의 제로거리를 꿈꾸는 모노노아와레적 공동성(共同性)이 자칫 타자성을 삭제하는 모노노아와레적 공동성(空洞性)의 위기를 불러일으킬 수 있음을 지적한다. 이 글에서는 양자의 논의를 참조하여 식민지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상징질서를 구축하려고 했던 식민지조선 지식인들의 논의가 상징계 바깥에 있는 대상a를 욕망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19세기 중반 이후 역내 시스템의 거대한 변화와 함께 국민국가의 고유성을 발견하려는 논의가 등장하지만, 기존의 중심이었던 중국을 완전하게 상대화하기는 쉽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 박은식과 신채호는 초월적 대타자 ‘조선’을 상정하고 이를 통해 제국일본의 상징질서에 균열을 일으키고자 했다. 이때 박은식과 신채호는 과거 노리나가가 그랬던 것처럼 목적론적 문헌학과 어원론에 의거했다. 그러나 이들의 기획은 대타자를 하나의 점에 고정시키는 것에 어려움을 겪었고, ‘조선’은 끝없는 기호의 환유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최남선은 3.1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모노노아와레적 감수성에 입각하여 개념화·원리화되지 않는 작은 것들에서 ‘조선’을 발견하고, 이를 ‘밝’이라는 최종심급에 위치시킴으로써 조선적인 것을 상징계에 진입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상징계로의 진입은 거세의 과정을 수반하는바, ‘조선’은 자신의 피를 그 대가로 치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여기에는 타자와의 합일을 통한 존재의 완성이 아니라 너와 나를 익사시키는 모노노아와레적 공동성(空洞性)의 폭력만이 가득했다.
This article traces the process by which intellectuals in colonial Chosun build up The symbolic of “A things of Chosun” by referring to the research of Kojin Karatani and Gyu-Tae Park on Japanese psychological analysis. Karatani analyzes that castration necessary for entering The symbolic has been excluded in Japan by focusing on reading Kan-bun, and the characteristics are found in Motoori Norinaga’s “Monono Aware”. Meanwhile, Chosun which was close to the world empire China, promoted stronger castration and repression than China. However, it is worth noting that Chosun became a colony of imperial Japan after the modern era, and castration to establish a symbolic order of nation-state was excluded. Park Gyu-tae explains the monono-aware by comparing it to the object petit a of Lacan’s theory, and the synergism of monono-aware dreaming of a zero distance from the other is the cavitation of monono-aware that eliminates the otherness. Point out that it can create a crisis. In this article, with reference to the discussions between the Karatani and Park, the discussion of the intellectuals of colonial Chosun who tried to establish a symbolic order in a unusually situation of colonization looked at the process of desire for object petit a outside The symbolic. Since the mid-19th century, discussions have emerged to discover the uniqueness of the nation-state along with huge changes in the regional system, but it was not easy to completely relativize China, which was the center of the civilization. In the midst of this, Park Eun-sik and Shin Chae-ho assumed a the Other “Chosun,” and tried to crack the symbolic order of imperial Japan. At this time, Park-Eunsik and Shin-Chaeho were based on teleological philology and etymology, as Norinaga did in the past. However, their plans had a hard time fixing the the Other to one point, and “Chosun” fell into the metonymy of endless preferences. After the March 1st Independence movement failed, Choi-Namsun discovered “Chosun” in small things that were not conceptualized and principled based on sensibility of mononoaware, and placed it in the final level of “bright” to enter the Symbolic of Chosun. However, entering the Symbolic entails a process of castration, and “Chosun” had to pay his own blood in return. Here, not the completion of existence through unity with the other, but only the violence of cavitation of monono-aware that drowns everyone.
この論文は、日本の精神分析に関する柄谷行人と朴奎太の研究にもとづいて、植民地朝鮮の知識人たちが「朝鮮なるもの」の象徴界を形作っていく過程を考察するものである。柄谷は音読と訓読の問題に着目し、日本においては象徴界へ進入するさいに必要となる去勢が排除されたと論じ、その事例として本居宣長の「もののあはれ」をとりあげる。他方、世界帝国たる中国に近い朝鮮では、中国よりも一層強力な去勢や抑圧が行われたという。ただし、朝鮮は近代以降、帝国日本の植民地となり、そのさい国民国家という象徴的な秩序の構築に必要となる去勢が排除されてしまったことに注意しなければならない。朴奎太は「もののあはれ」をラカン理論における「対象a」の概念を借りて説明しつつ、他者とのゼロ距離を思い描く「もののあはれの共同性」が、ややもすれば、他者の他者性を削除する「もののあはれの空洞性」につながってしまいかねないことを指摘する。 この論文では、両者の議論を参照しながら、植民地という特殊な状況のなかで象徴的な秩序を築きあげようとした植民地朝鮮の知識人たちの思惟が、象徴界の埒外にある「対象a」を欲望していく過程を検討してみた。19世紀半ば以来、域内におけるシステムの巨大な変化とともに、国民国家の固有性をみつけだそうとする議論が現れるも、既存の中心であった中国を完全に相対化することは容易ではなかった。そこに朴殷植と申采浩は、超越的な大文字の他者としての「朝鮮」を想定し、それをもって帝国日本の象徴的な秩序に亀裂を刻み込もうとした。そのさい、朴殷植と申采浩は、宣長に倣って目的論としての文献学、そして語源論を用いていた。しかしながら、大文字の他者を一つの点に固定させることができず、結局「朝鮮」は絶え間ない記号の換喩の連鎖へ陥ってしまった。 一方、崔南善は、3・1運動の失敗以来、「もののあはれ」の感受性を受け入れつつ、概念化・原理化しえない「細やかなもの」から「朝鮮」を読みとり、それを「ぱく」という最終審級へと位置づけることで、「朝鮮なるもの」を象徴界へ入れ込もうとした。しかし、象徴界への進入には去勢が必要となるため、「朝鮮」は己れの血を対価として差しださねばならなかった。ここにあるのは、他者との合一による存在の完成ではなく、汝と我を溺れ死にする「もののあはれの空洞性」のみであったといわなければならな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