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소설과 이해조
한국 근대소설에 관한 연구는 작가 또는 작품에 대한 연구를 넘어 언어, 제도, 매체, 문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관점에서 이루어졌다. 특히, 최근의 연구 경향은 국문학이라는 분과 학문의 경계를 넘어 연구 대상과 범주의 외연을 차츰 넓혀가는 추세를 보인다. 물론 이러한 연구 경향은 그동안 정체되어 있던 국문학 연구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한편, 해석의 지평을 한층 확장시켰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새로운 연구 대상을 포착하거나 새로운 방법론을 찾기 위한 분주한 노력은 오늘날 문학의 위치를 반영하듯 문학 그 자체를 소홀히 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요즘 한 작가의 작품세계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찾기 어려운 이유도 이러한 연구가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또는 이미 시효가 만료된 것처럼 여기는 분위기를 반영한 결과일 것이다.
근대 초기 작가와 텍스트를 다루는 경우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 과거의 텍스트가 지닌 역동적 자질을 소거하고 오늘날 문학 또는 소설의 관점에서 재단하는 한 그 이상의 진전된 논의는 불가능하다. 오늘날 해석 주체가 지닌 보편에의 욕망은 근대 초기 문학이 지닌 특수한 자질과 차이를 무화시킨 채, 이미 자신이 의도한 체계 안에서 필요한 자료들을 선택하고 그것에 질서를 부여하도록 강제한다. 가령 후대 연구자들이 만들어 놓은 ‘신소설’이라는 양식을 먼저 전제한 뒤 대상 텍스트에 접근하는 방법이나, ‘판소리 산정’을 고소설의 맥락에서 이해하려는 시도가 그렇다. 또한 현대문학 연구자들이 이해조의 신소설에만 집중하거나 고전문학 연구자들이 이해조의 ‘판소리 산정’이나 『정선조선가곡(精選朝鮮歌曲)』, 『홍장군전(洪將軍傳)』, 『한씨보응록(韓氏報應錄)』 등에만 관심을 갖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더욱이 지금까지 이해조를 포함한 신소설 연구의 대부분은 단행본을 대상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근대 초기의 주된 문학 유통 양식인 미디어의 물질성을 간과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이러한 방식은 자칫 연구자의 시선을 작품의 내용 및 주제에 한정시켜 연구 대상이 지닌 역동적 자질을 드러내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 이해조 문학 연구의 가장 탁월한 성과이자 한계로 작용했던 ‘계몽성’과 ‘통속성’이라는 기준이 최근까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사정도 바로 이러한 연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근대 초기의 문학을 출판?인쇄 매체와의 관련 양상 속에서 살피는 일은 텍스트와 컨텍스트 사이의 관계를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시야를 제공하며, ‘작가-미디어-독자’ 사이의 관계에서 이루어진 근대문학의 형성 과정을 더욱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이해조 문학 연구』(소명출판, 2015)는 이러한 관점에서 출발하여 한국 근대소설의 형성 과정에서 가장 활발한 작품 활동을 했던 작가 이해조의 문학 세계를 근대 출판?인쇄 매체와의 관련 양상을 통해 살피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이해조의 문학 세계는 신문?잡지?단행본 등 새롭게 형성된 근대 매체와의 결합을 가장 적극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동시기의 작가들 중 가장 많은 수의 작품을 발표하였기도 하거니와 다양한 문학적 실험을 시도하였다는 점에서도 특징적이다. “굳이 한 작가의 작품 세계를 다룬 이유는 한 작가의 일관된 문학적 지향점이 그것을 담고 있는 매체와의 관련 양상 속에서 각각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며, 이러한 방법은 이 시기 근대문학이 지닌 핵심적 속성을 드러내기 위한 효과적인 전략이 되었다”고 책의 저자는 말한다. 따라서 이해조 문학 텍스트 전체의 규모를 확인하고, 이를 신문?잡지?단행본 등 당시의 출판?인쇄 매체와의 관련 양상 속에서 입체적으로 다루고자 했다. 특히, 1907년 5월 이후에 발행된 『제국신문(帝國新聞)』 원본을 입수하여, 그동안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던 『제국신문』 연재소설의 특성을 밝히고, 『제국신문』에 연재된 ?륜리학?의 소재를 파악하여 이해조 소설의 사상적 원리를 제시하였다. 또한 『대한민보(大韓民報)』에 수록된 ?만인산(萬人傘)?이 이해조의 작품임을 입증하고, 『강명화실기(康明花實記)』와 『여(女)의귀(鬼)강명화전(康明花傳)』이 각기 다른 작품임을 밝혔다. 그밖에 『신해음사(辛亥?社)』에 수록된 한시 두 편의 소재를 파악하고, 이를 통해 『매일신보』 재직 중 작가의 내면 심리를 살피기도 하였다.
이 책은 근대 초기의 문학이 당대의 신문이나 잡지, 서포상들이 발행한 단행본 등 새로운 미디어적 조건과 결합하는 양상을 실증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특히, 이해조 문학과 관련한 다양한 사진 자료들은 근대 초기 문학의 실상을 살필 수 있는 꽤나 흥미로운 볼거리가 될 것이다. 책 말미의 부록에는 미공개 『제국신문』에 수록된 이해조의 ?윤리학?을 발굴하여 그 원문을 수록하였다.
최초의 전업 작가, 이해조
이인직과 함께 초기 근대문학의 형성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이해조는 한국 근대 문학사에서 최초의 전업 작가였다. 이인직은 일본에서의 유학경험을 토대로 신문소설의 모델을 도입하였으나, 소설을 자신의 정치적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였다. 하지만 이해조는 이인직과는 달리 문학 자체에만 전념하여 죽기 직전까지 다양한 문학 활동을 지속했다. 이해조의 문학을 제외한 다른 양식의 글들을 찾기 어려운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이해조는 전통적 이야기 화소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이를 사실주의에 기반을 둔 근대적 소설 모델로 변용시킨 작가이기도 하다. 이해조의 문학적 편폭이 새롭게 형성된 신문?잡지?단행본 등 근대적 출판?인쇄 매체와 적극적으로 결합하여 이루어진 것임을 상기할 때, 그의 소설이 전통적 서사 양식을 일정부분 계승하면서도 이 시기 소설의 특수한 모델을 확립하였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다양한 비유와 속담을 활용하여 우리말의 다채로운 멋을 계승하고, 생생한 구어체 한글 문장을 구사하여 당시 민중들의 언어 사용을 풍부하게 재현하였다.
근대문학의 형성기에 이해조가 이룬 공헌은 신소설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는 판소리 산정 작업을 통해 구술 문화로 전해지던 판소리를 근대적 독서물(讀書物)로 전환하였으며, 이를 통해 구극 공연의 활성과 단행본 출판업계의 부흥을 이끌 수 있었다. 또한 무가, 상여소리, 잡가와 시조 등 우리 노래에 대한 관심은 다양한 소설 작품을 통해 재현되었으며, 명창 박춘재 구술의 ‘정가(正歌)’를 기록한 『(정선)조선가곡』 역시 구술로 전해지던 음악 텍스트를 근대적 읽기 텍스트로 전환시킨 소중한 작업이었다. 이해조는 근대 추리소설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쌍옥??을 창작하였고, 세계 최초의 장편 추리소설인 에밀 가보리오의 『르루주사건』을 『누구의 죄』로 번역하였다. 추리소설이라는 장르 문학의 형식을 최초로 시도하였다는 점 역시 이해조의 공적 중 하나이다. 또한 『홍장군전』과 『한씨보응록』을 통해 역사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는 점도 지나칠 수 없다.
문학사 기술의 오랜 관행처럼, 문학 양식의 발전사를 염두에 둔다면 신소설은 여전히 완성된 근대에 미달하는 과도기적 존재 양식에 불과하다. 또한 이러한 시각이 이미 전제된 상태에서 당시의 텍스트는 온통 균열과 한계를 노출하는 불완전한 대상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신소설에 대한 지나친 의미 부여는 당시 신소설이 다양한 글쓰기 양식과의 경합 속에서 생성하고 소멸된 양식이라는 점을 간과하거나 신소설 이외의 다양한 문학적 글쓰기의 존재를 외면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해조에 대한 연구는 기존 연구가 봉착한 한계를 비켜갈 수 있는 효과적인 전략이 되었다. 이해조는 한문현토소설, 신소설, 번역소설, 토론체 소설, 판소리 산정, 한시, 추리소설, 역사소설, 가곡집 편찬 등 근대 초기 문학적 글쓰기의 가능성을 다양한 방면에서 실험했던 작가이다. 또한 이해조의 문학 활동은 새롭게 형성된 근대적 출판?인쇄 문화와 밀접한 연관 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근대문학의 형성 과정을 더욱 입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이해조의 문학 활동이 1910년 강제병합이라는 초유의 사건 전후에 이루어져, 저항과 협력의 갈등 속에서 이루어진 근대문학의 제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이 책은 최원식 교수의 이해조 연구 이후 30년 만에 출간된 본격적인 이해조 연구이다. 공고하게 지속되어 온 이인직 중심의 문학사 서술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동시에 새로운 작가 연구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아울러 독자들은 섬세한 고증과 배치로 이루어진 자료 중심의 연구가 지닌 미덕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목표는 이해조라는 한 개인의 작가론적 탐색 그 자체에 머물지 않는다. 결국 이 책은 전통적인 것과 근대적인 것, 민족적인 것과 제국주의적인 것들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발생한 근대문학의 일면을 한 개인의 모색과 고투의 흔적을 통해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오늘날 해석 주체의 편향된 시각을 경계하고, 당시 텍스트의 존재 양상과 그것의 배치에 착목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해조의 문학은 새로운 출판?인쇄 문화 속에서 이루어진 한국 근대문학의 특수한 성격을 드러내기에 적합한 대상임이 분명하다. 이러한 작업이 기존 문학사 기술에 대한 반성과 그간 문학 연구에서 소외되었던 개별적이고 특수한 것들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길 바란다.
목차
책머리에
제1장 서론
1. 연구의 목적
2. 연구사 검토 및 문제 제기
3. 연구의 대상과 방법
제2장 1900년대 이해조 문학의 특질과 의미
1. 근대 잡지와 이해조 소설
1) 1906년 이전의 행적과 문학 활동의 계기
2) ?소년한반도(少年韓半島)?와 한문현토소설 ?잠상태(岑上苔)?
2. 근대 신문과 이해조 소설
1) ?제국신문(帝國新聞)? 소재 이해조 소설의 특질과 의미
(1) 1907년 ?제국신문?의 체제 변화와 소설 배치
(2) 이해조 연재소설의 특질과 의미
2) ?대한민보(大韓民報)? 소재 이해조 소설의 특질과 의미
(1) ?대한민보?의 편집 체제와 소설 배치
(2) 현실 비판의 목소리와 개별 주체의 욕망
3. 단행본 소설과 교육?계몽운동
제3장 1910년대 이해조 문학의 특질과 의미
1. ?매일신보(每日申報)? 소재 이해조 소설의 특질과 의미
1) ?매일신보? 국한문판의 독자전략과 초기 이해조 연재소설의 특징
(1) ?매일신보?의 소설 기획과 이해조
(2) 남성독자와 보수적 가치의 재현
2) 1912년 체제 변화와 이해조 문학의 두 가지 갈래
(1) 독자 통합과 지면 분할
(2) 식민담론의 삼투(?透)와 균열
(3) 판소리 산정(刪正)의 특질과 의미
3) ?신해음사(辛亥?社)?에 수록된 이해조의 한시 두 편
2. ?매일신보? 이후 이해조 문학의 향방
제4장 결론
보론 ‘정탐소설’ ?박쥐우산?의 작자 문제
1. 머리말
2. ?조선일보? 소재 ?박쥐우산?과 이해조
3. ‘정탐소설’의 계보와 ?박쥐우산?
4. 맺음말
부록 ?제국신문? 소재 이해조의 ?륜리학?
참고문헌
간행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