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우리나라에서 아메리카니즘 연구가 활기를 띠고 있지만 대개 (탈)냉전 시기를 대상으로 한다. 물론 미국이 전 지구적 헤게모니 국가로 부상하는 계기가 된 것이 냉전 문제였다는 점을 염두에 둘 때, 그리고 여기에 한국전쟁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한국에서 아메리카니즘 연구가 해방 이후 시기에 집중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세기’였던 20세기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금융상의 우위가 런던에서 뉴욕으로 이전되고 미국식 이상주의가 국제관계에 대두되며 무엇보다 음악(재즈)과 영화(할리우드)를 통해 미국의 대중문화가 전 세계를 휩쓸게 되었던 초창기 아메리카니즘의 문제를 간과할 수 없다. 노동자를 중산층에 포섭하며 소비적 근대성을 형성해가던 미국은 1920~1930년대 세계 영화의 65~85%, 1939년엔 65%를 차지하게 되는 할리우드 영화를 통해 아메리칸 라이프스타일을 전 세계에 유포한다. 식민지 조선의 경우에도, 1916년을 기점으로 이전의 유럽(특히 프랑스, 이탈리아) 영화를 대체하면서 극장 프로그램의 중심을 차지했던 미국영화의 문제를 규명하지 않고서는 영화 연구의 틀 자체를 마련할 수 없다. 더욱이 영화가 수입, 상영되면서 곧 제작이 시작되었던 여타 국가들과 달리 20여 년간 영화를 만들지 않고(못하고) ‘감상만’ 해왔던 조선의 경우, 미국영화의 수입, 배급, 흥행과 관람의 문제를 간과한 채 역사를 서술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이 책『조선영화와 할리우드』(소명출판, 2014)가 기획되었다. 연구모임 시네마바벨의 아홉 필자는 1916년경부터 1949년경까지의 조선영화와 할리우드의 관계를 자신들만의 색깔로 다채롭게 풀어냈다.
조선영화와 할리우드, 그 관계에 대하여
백문임의 ?감상(鑑賞)의 시대-조선의 미국 연속영화?는 미국영화가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1916년부터 약 10년간 인기를 끌었던 연속영화(serial film)의 문제를 규명한다.
유선영과 박선영은 조선에서 할리우드의 장르와 스타가 수용, 전유되는 양상을 분석한다. 유선영의 ?할리우드 멜로드라마, 《동도《의 식민지적 영화경험?은 ‘통쾌감’이라는 감정을 키워드로 하여 할리우드 멜로드라마 《동도(Way Down East)《(1920)에 대한 조선인 관객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일종의 징후로 읽어낸다. 한편 박선영의 ?잡후린(?候麟)과 애활가(愛活家)?는 무성영화 시기 최고의 스타였던 찰리 채플린이 조선 극장가에서 수용된 양상을 분석하고 있다. 코미디, 특히 할리우드 슬랩스틱은 조선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장르 중 하나였는데, 그중에서도 채플린의 영화에 대한 조선 관객들의 열광은 특별한 것이었다. 급작스런 근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떠도는 도시빈민과 노동자들의 문제를 전면화하고 그것을 슬랩스틱을 통한 고통스러운 웃음을 통해 대리경험하게 만드는 한편, 그 웃음의 의미를 식민지 조선의 상황과 견주어 볼 수 있게 만든 것이 조선의 스타 채플린의 의미라고 말한다.
김상민의 ?《아리랑《과 할리우드?는 조선(한국) 영화사의 정전 맨 첫머리에 올라있는 《아리랑《이 다름 아닌 할리우드의 장편 극영화(feature film)를 모델로 삼은 최초의 조선영화라는 점을 규명한다. 한편 유승진은 ?보편으로서의 할리우드와 조선영화의 자기규정의 수사학?에서 발성영화로의 전환기에 ‘내셔널 시네마(national cinema)’의 변별적 자질들에 대한 관심이 두드러지는 양상을 분석한다. 전우형은 ?이효석 소설의 할리우드 표상과 유럽 영화라는 상상의 공동체?에서 할리우드라는 압도적 현실 앞에서 ‘구라파(유럽)’ 영화에 시선을 고정시키게 되는 식민지 지식인의 취향과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추적한다.
이화진과 구인모, 심혜경은 그간 주목되지 않았던 대상에 천착함으로써 이 시기 할리우드의 문제를 새로운 지평에서 고민할 수 있게 해준다. 이화진의 ?두 제국 사이 필름 전쟁의 전야(前夜)?는 유독 조선에서만 실시되었던 외국영화(결국에는 할리우드 영화) 상영 규제정책인 1934년 ‘활동사진영화취체규칙’에 대한 본격적인 작업으로, 이 제도가 식민지 조선뿐 아니라 제국 일본을 통틀어 최초로 시도된 영화 쿼터제였음을 밝히면서 그 의미를 분석하고 있다. 구인모는 ?유성기 음반으로 들은 서양영화?에서 그간 소개, 정리되지 않았던 영화설명 음반 자료를 개관하고 그 배경과 특징을 분석하고 있다. 심혜경은 ?안철영의『성림기행』에서의 할리우드 그리고 조선영화?에서 할리우드 영화와 더불어 미군정을 경험하며 조선영화의 정체성을 모색하던 1940년대 중후반의 국면에 주목한다. 특히 안철영이라는 영화인/관료의 행보를 추적하고 그 할리우드 체험을 통해 할리우드가 막연한 상상의 공간이라기보다 조선의 영화제작에 어떠한 방식으로든 관계를 맺는 실질적 공간으로 구체화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식민지 시대 영화 연구의 새로운 발걸음
오랫동안 식민지 시대 영화 연구는 그 시기를 경험한 영화인들의 기억 및 그것에 기반한 역사기술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못했다. 식민지 시대에 제작된 영화 텍스트가 남아있지 않았다는 사실도 이 정체(停滯)에 다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상황이 바뀐 것은 2000년대 중반 몇 편의 영화 필름들, 특히 식민지 말기에 제작된 필름들이 ‘발굴’되면서다. 많은 연구자들이 지적했듯, 과거 영화사들에 서술되었던 것과 이 필름들이 보여주고 있는바 사이에는 적지 않은 간극이 발견되었고, 이 지점은 마침 인문학계에서 식민지 말기를 재조명하던 연구 흐름과 맞물리며 풍부한 논의를 낳기도 했다. 그즈음 식민지 조선영화의 산업과 정책, 극장과 관람성 등 그간 조선영화인들이 제작한 영화 중심의 영화사에서 배제되거나 주변화되었던 주제들에 주목하는 젊은 연구자들이 생겨났고, 이들은 많은 부분 일본어 자료들을 주요 참조지점으로 삼으면서 새로운 연구 영역들을 만들어 냈다. 마침 한국영상자료원 등의 아카이빙 작업도 활발해지고 있었고, 각종 영화 DB와 유튜브 등의 매체에 힘입어 접근이 용이해진 자료들은 과거와는 다른 방식의 연구들을 가능케 한 측면이 있다. 해외 학계에서 한국 영화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면서 문제의식과 자료 등을 한국의 학자들과 거의 실시간으로 공유하게 된 것도 논의를 풍부하게 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이 책 역시 넓게 보면 이러한 지형 속에서 고안되었고 또 그렇기 때문에 생산될 수 있었다. 조선영화의 문제를 조선인들이 제작한 영화를 중심에 놓고서가 아니라 ‘할리우드’라는 (대)타자를 고리삼아 분석하는 책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지평의 변화 및 거기에 공감하며 모색을 하던 아홉 필자들의 학문적 열정 덕분이다. 그리고 이 책은 그 첫 발자국을 세상에 내놓는 것이다. 식민지 시대 영화 연구의 새로운 발걸음이기에 더욱 기대된다.
목차
책머리에
감상(鑑賞)의 시대, 조선의 미국 연속영화 백문임
할리우드 멜로드라마, 《동도(東道)《의 식민지적 영화경험 유선영
《아리랑《과 할리우드 김상민
잡후린(?侯麟)과 애활가(愛活家) 박선영
조선 극장가의 찰리 채플린 수용과 그 의미
-1920~1930년대 경성 조선인 극장을 중심으로
두 제국 사이 필름 전쟁의 전야(前夜) 이화진
일본의 ‘영화 제국’ 기획과 식민지 조선의 스크린쿼터제
보편으로서의 할리우드와 조선영화의 자기규정의 수사학 유승진
《군용열차《에 나타난 분열의 양상과 해석가능성을 중심으로
유성기 음반으로 들은 서양영화 구인모
근대기 영화설명 음반을 중심으로
이효석 소설의 할리우드 표상과 유럽영화라는 상상의 공동체 전우형
안철영의『성림기행』에서의 할리우드 그리고 조선영화 심혜경
초출일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