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한국어 표기의 정전, 〈한글 마춤법 통일안〉(1933)의 맥락 “한글 맞춤법은 표준어를 소리대로 적되, 어법에 맞도록 함을 원칙으로 한다.”(현행 〈한글 맞춤법〉 제1장 총칙, 제1항) “한글 마춤법(綴字法)은 표준말을 그 소리대로 적되, 語法에 맞도록 함으로써 原則을 삼는다.”(1933년의 조선어학회 〈한글 마춤법 통일안〉 총론, 제1항) ‘표준어, 소리대로, 어법에 맞도록’, 이 ‘원칙’은 100년 가까이 그대로 유지되어왔다. 그런데 이 셋은 어디서 나왔으며, 그 의미는 무엇일까. 이 책은 한글 맞춤법의 성립을 무엇보다도 먼저 ‘언어적 근대’의 형성이라는 언어사상사의 맥락에서 살핀다. 근대 시기 서유럽에서는 고전 라틴어, 동아시아에서는 고전 한문이라는 기존의 보편문어를 벗어나 각 민족의 세속어를 바탕으로 한 균질적 단일언어사회를 지향한다. 글로 씌어진 경험조차 일천했던 각 민족어를 대상으로 한 ‘국어사전’과 ‘국어문법’의 편찬은 동서를 막론한 근대의 특징적 양상이고, 표기법의 통일은 그것을 위한 필수적인 과제였다. 〈한글 마춤법 통일안〉 또한 독립신문 창간(1896)에서 유길준의 『대한문전』(1909), 주시경의 『국어문법』(1910)에 이르는 근대계몽기의 고뇌와 모색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오늘까지 이어 내려오는 ‘우리 언어적 근대’의 핵심 축이었다.
“소리대로 적되”와 식민지 사회의 헤게모니 관철 방식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불가피하게 ‘식민지 근대화론’이라는 쟁점과 부딪힌다. 조선어학회의 〈한글 마춤법 통일안〉은 식민지 치하에서 애초 『보통학교 조선어급한문독본』을 편찬하기 위해 제정되었던 조선총독부의 ‘언문철자법’과의 관계 속에서만 그 의미를 제대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대체로 〈한글 마춤법 통일안〉이 언문철자법의 오류나 문제를 극복, 해결한 것이라는 정도로 평가해왔지만, 실은 〈한글 마춤법 통일안〉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 가운데 중요한 한 축은 언문철자법에서 온 것이었다. “소리대로 적되, 어법에 맞도록 함으로써 원칙을 삼는다”의 ‘소리대로 적되’ 부분이 바로 언문 철자법이 지향한 ‘표음적 표기’의 다른 표현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글 마춤법 통일안〉이 조선총독부의 언문철자법에 일방적으로 영향을 받았다는 건 아니다. 사태는 생각보다 복잡하다. ‘소리대로 적게 한다’는 언문철자법 원안의 의도는 오히려 심의에 참여한 조선인 위원들의 반대에 부닥쳐 번번이 좌절되었다. 언문철자법이 애초에 의도한 ‘표음적 표기’는 1920년대 중후반 조선의 지식인 사회에서 조선어 교사와 연구자로 구성되는 전문가 집단이 형성되고 그들의 전반적인 동의를 얻은 뒤에야 비로소 관철될 수 있었다. 식민지 사회의 헤게모니가 어떻게 관철되었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어법에 맞게”와 ‘국어문법’의 구상 ‘소리대로 적는다’와 함께 〈한글 마춤법 통일안〉의 핵심적인 원칙이었던 ‘어법에 맞도록 한다’는 것은 총독부의 언문철자법이 처음부터 부담스러워했던 방향이었으나, 역시 1920년대 중후반 조선의 지식인 사회에서 형성된 광범위한 공감대가 언문철자법을 〈한글 마춤법 통일안〉에 가까운 쪽으로 견인해나간 것이었다. 이 책이 당대의 조선어 연구가 지향하고 있던 방향, 그리고 치열하게 전개된 논쟁과 토론을 비중 있게 다룬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들은 언어에는 인간이 개입할 수 없는 나름의 규칙과 법칙이 있다고 보았는데, ‘어법에 맞도록 한다’의 ‘어법’이 바로 그러한 관점을 반영한 것이다. 이 ‘어법에 맞도록 한다’는 원칙은 소리 나는 대로가 아니라 원래의 형태를 밝혀 적는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주시경의 표기 이론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주시경은 귀에 실제로 들리는 구체적인 소리가 아니라 ‘본음, 원체’라는 추상적 층위의 소리를 적는 것이 문법에 맞는 것이라고 보았다. 주시경은 ‘국어’를 이처럼 추상적 층위에 존재하는 것으로 설정했고, 그래서 지역과 계층, 세대와 젠더에 따른 수많은 변이와 변종 너머에 존재하는 ‘국어문법’을 구상할 수 있었다. 이러한 ‘국어문법’은 균질적 단일언어 사회를 형성하는 기본 조건인 동시에 소수어와 방언을 억압하는 국가장치로 기능할 수 있게 된다.
〈통일안〉 성립의 역사적 의미와 새로운 해석 저자는 〈한글 마춤법 통일안〉 성립의 배경과 과정뿐만 아니라 그것의 제정 전후에 벌어진 대립의 의미를 좀더 거시적인 맥락에서 해석하고 있다. 조선어학회가 지향한 ‘표음문자의 표의화/시각화’가 표음문자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였으며, 이에 반대한 박승빈 쪽의 표기법이 사실은 한자훈독식 표기에서 출발한 것이고 따라서 ‘표음문자의 표의화’가 불필요했음을 밝힌 것이 그런 부분이다. 또한 사회주의자들이 당대의 조선어 표기법 논쟁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었는가, 그리고 해방 후 북한에서 수행된 언어정책과 〈한글 마춤법 통일안〉이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도 다룬다. 해방 직후 북한에서는 〈한글 마춤법 통일안〉에 상당한 수정을 가했지만, 그것은 그 기본 원칙을 예외 없이 관철하려는 노력에서 나온 것이었다. 세부적으로도, 저자는 몇 가지 새로운 주장을 내놓고 있다. 먼저, 〈한글 마춤법 통일안〉 ‘총론’의 “그 소리대로 적되, 語法에 맞도록 함으로써 原則을 삼는다”에서 ‘소리대로 적되’는 단순히 소리 나는 대로 적는다는 음소 표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표기(‘텬디’)를 인정하지 않고 당대의 소리(‘천지’)를 반영한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이는 조선어학회 인사들의 증언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이거니와, 〈한글 마춤법 통일안〉을 총독부의 언문철자법과의 관계 속에서 보면 명확히 드러나는 부분이다. 또 두음법칙 문제에서, 예컨대 ‘勞動’을 ‘로동’이 아니라 ‘노동’으로 적게 한 것 역시 조선어학회 인사들이 ‘로동’을 역사적 표기로 보았기 때문인데, 그러나 두음법칙은 역사적 표기의 문제가 아니어서, ‘어법’에 맞도록 한다는 원칙에 따른다면 ‘로동’으로 적는 것이 (그러나 발음은 [노동]으로 하는 것이) 오히려 〈한글 마춤법 통일안〉의 기본 원칙에 부합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최현배가 도입한 용언의 활용, 특히 불규칙활용이라는 개념이 표기법 논쟁 과정에서 힘을 얻게 되었다는 점 역시 중요한 이 책의 새로운 주장이다.
‘근대의 언어사상사’ 프로젝트, 그 첫발을 내딛다 이 책은 장대한 ‘근대의 언어사상사’ 프로젝트의 첫 권이다. 1933년의 조선어학회 〈한글 마춤법 통일안〉 성립의 역사와 사회적 맥락에 초점을 맞춘 이 책에 이어, 저자 김병문 교수는 1890년대에서 1910년에 이르는 근대계몽기의 ‘국문론’을, 그리고 ‘조선어학회 사건’과 그것이 결정적인 규정력을 발휘했던 해방 전후~1960년대 초에 이르는 언어 문제를, 그리고 60년대 후반 이후 남북의 언어정책과 연구의 변화를 담은 세 권의 책을 더 쓸 계획이다. 이 네 편의 ‘근대의 언어사상사’에는 조선어/한국어를 대상으로 하는 지적 고투가 어떻게 식민주의와 냉전의 틀에 긴박되어 있었는가, 그리고 그러한 틀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의식이 깔려 있다. 우리는 ‘드디어’ 시작된 “언어적 근대의 질곡을 치열하게 파헤친 한국어 맞춤법의 계보학”(김진해)을 가지고, “‘국어’라는 신전을 받치고 있는 〈한글 맞춤법〉이라는 지층 밑으로 파고 들어가, 그 신전이 세워지기까지의 과정…”의 고고학적 탐색(백승주)을 기꺼워하며, 내일을 기약할 수 있게 되었다. 다시, 출발점: 우리는 왜, 어떻게 해서, “표준어를, 소리대로 적되, 어법에 맞게” 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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