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고구려 유민출신 고선지 장군’에 대한 연구나 글들은 주로 ‘고구려 유민’이란 데 초점을 맞춘 민족주의적 관점이나, ‘나폴레옹의 알프스원정보다 위대한 업적’ 등의 단편적이고 영웅적 관점에 치우친 점들이 많았다.
이 책 『고구려 유민 고선지와 토번·서역사』는 이런 관점을 넘어 7~8세기 동아시아와 중앙아시아의 역사적 변화과정을 살핀 위에, 고선지 장군이 주 활약무대인 토번과 서역에서 활동한 20여 년간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밝힌 책이다. 오랫동안 고선지 장군의 일생을 ‘고선지루트’를 탐사하면서 연구해 온 저자 지배선 교수가 토번과 서역에서 고구려 유민 고선지에 대한 위상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고선지가 활동한 그 이전 시대부터 토번과 서역 역사를 동시에 다루었다는 것이 이 책의 특징이다.
고선지 장군의 동시대만으로는 토번과 서역 역사를 제한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어 고선지가 중앙아시아를 제패했던 사실을 바르게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연유로 고선지보다 앞선 시대의 토번과 서역의 역사를 다루었다. 마지막 하한연대를 고선지가 활약했던 천보 연간까지의 토번과 서역사를 본서에서 언급했다.
저자는 우선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까지 영향권에 둔 고선지의 그 지역의 국가의 종교와 생활상을 이해하기 위해 신라 승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과 당나라 승려 현장의 『대당서역기』의 내용을 비교, 분석하면서, 그들이 지났던 지역과 고선지의 원정루트 장소들의 위치를 추적한다. 안서(쿠차)·언기(Karsshahr, 카라샤르)·우전(호탄, Khotan)·소륵(카슈가르, Kashgar)의 사진(四鎭)과 석국(타슈켄트), 강국(사마르칸트), 연운보(치트랄), 탈라스 등의 현재를 직접 답사하면서, 옛 기록들과 일일이 대조하고 사진으로 담은 점 또한 이 책이 가진 장점이다.
저자는 중앙아시아의 강국 돌궐의 분열과 와해과정, 토번(티베트)의 급속한 팽창과 당나라와의 기나긴 전쟁과정, 또 이슬람 아랍제국의 서진으로 인한 당 제국과의 충돌과정과 그 선상에서의 고선지의 활약상 등을 구체적이면서도 입체적으로 담았다.
특히 본문 제6장과 7장에서, 난공불락 요새인 연운보를 기습 점령하고, 곧이어 소발률국을 함락시킨 과정을 보면, 마치 당시 전장터를 옆에서 본듯한 생생한 현장감을 느낄 수 있다.
20년간 ‘중국 산악의 주인’으로 불려졌던 중앙아시아의 실질적 패자 고선지 장군을 역사적으로 가장 드라마틱하게 만든 것은 751년 7월 지금의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국경지역 탈라스에서 벌어진 아랍연합세력과의 탈라스 전투였다. 당 연합군 내부 갈라룩족의 배신 등으로 가장 쓰라린 패전을 당하고 당제국의 서진을 마무리해야 했던 고선지는 이후 동서교섭사 상의 큰 계기를 마련한 인물로 기억된다.
당으로 귀환한 후의 고선지의 생애는 그야말로 비극적이었다. 안녹산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당 조정은 고선지 장군을 다시 진압군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그런데 반군을 방어하기 유리한 동관으로의 전략상 후퇴로 말미암아, 그는 환관 변령성 등의 모함을 받아 충실한 오른팔이었던 봉상청과 함께 전장터에서 참형에 처해졌고, 이후 그의 정벌 흔적들은 당제국의 쇠퇴와 함께 많이 잊혀졌다.
그러나 저자는 동서 문명교류사에 기여한 고선지 장군의 흔적은 세계문명사에서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비중이 매우 컸다고 하고, 이를 입증하기 위해 1세기 전부터 동서양의 많은 학자들이 고선지 장군의 행적을 연구했음을 들고 있다.
저자는 중앙아시아와 멀리 서아시아에서의 고선지의 위상을 파악하는 작업으로서 토번과 서역사 연구는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또한 8세기 이전의 토번과 서역의 역사는 고구려·신라·백제가 서방세계와 어떤 관계였나를 이해하는데도 매우 중요하다고 언급한다.
이런 사실은 고구려와 서역 관계에서 사마르칸트(강국)의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의 고구려 사람 2인의 모습에서도 확인된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인 온달 아버지에 대한 언급 없이 무시해도 좋을 바보로만 묘사되었다. 그런데 저자는 이보다 앞선 시기 고구려와 교역한 국가 강국의 왕성(王姓)이 온씨라는 사실에서 ‘온달의 출신’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이와 같은 연결고리를 통해 온달의 부계 혈통이 사마르칸트의 왕족이었을 것이라는 설을 제기하였다.
또 『삼국유사』에서 충담이 지은 향가 「찬기파랑가」의 분석에서는, 지금까지 정체가 모호했던 ‘기파랑’을 쿠차 출신의 승려 ‘구마라집(鳩摩羅什)’이라고 규명하였다. 이에 따라 기파랑의 부모도 천축인 구마라염과 서역 쿠차(龜玆)국왕의 누이동생이었다는 사실을 서술하면서, 서역-중국-한국을 잇는 국제 문화교류의 활발했던 모습을 상기시켜 준다.
한편 저자는 고구려가 고대 동북아에서 번영한 교역국가였음을 주장한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수나라가 거란을 공격하기 위해 돌궐인으로 구성된 2만 기병을 동원했던 전략에서, 수나라 군이 거란 영토에 들어갈 때, 거짓으로 고구려와 교역하기 위해 지나려한다고 말하자 거란이 의심하지 않았던 사실을 든다. 수나라 장군 위운기(韋雲起)는 고구려 대상으로 위장하여 거란을 속이기 위해 기병을 1천 단위로 1리씩 떨어져 거란 영내를 통과했는데도, 그 큰 규모의 숫자에도 거란이 아무 의심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고구려의 국제 교역규모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실례이다. 그렇다면 사마르칸트의 아프라시압 궁정 벽화의 고구려 사신의 수가 두 사람 만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실제로 고구려 사절이 소그드로 갈 때 적어도 그 수는 수백 명 이상이었다.
이 책 『고구려 유민 고선지와 토번·서역사』는 고선지의 행적 규명이 일차 목표였다. 아울러 토번과 서역의 역사 규명을 통해 고구려는 물론이고, 더 나아가 신라와 백제가 북아시아에서 중앙아시아를 지나 서아시아와 교역한 상대 국가였다는 사실을 밝혔다. 관련 사료들을 이처럼 방대하게 섭렵하고 현장 답사를 충실하게 함으로써, 유민출신 한 장군의 역사로서만이 아니라. 고대 한국사와 세계사가 만나는 빛나는 한 접점으로서의 ‘고선지 상’을 뚜렷이 도출했다는 데서 이 연구의 무게를 느낀다. 책에 수록된 고선지루트 선상의 많은 사진들은 현장 연구의 중요함을 새삼 드러내는 증거자료이기도 하다.
목차
제1장 서론
제2장 대당제국과 고선지 일가의 행적
1. 고사계 일가와 하서
2. 서역과 신라관계-충담의 [讚耆婆郞歌]와 鳩摩羅什
3. 서역 역사와 고선지 일가의 안서 이주
4. 안서부도호 고선지 장군과 達奚部 원정
제3장 고선지 장군의 토번 정벌
1. 7~8세기 초 서역에서 토번과 서돌궐의 역학구도
2. 7세기 중엽 당의 安西·?右를 침공한 토번
3. 백제 유민 흑치상지의 토번 방어와 하원군 경영
4. 武則天시대의 당과 토번 관계 분석
제4장 당 현종의 토번 대책
1. 당 현종 개원년간의 토번 관계 분석
2. 당 현종 天寶 원년~6년 동안 토번 관계 분석
제5장 고선지 장군의 토번 연운보 원정 이전의 서역 상황
1. 천보 6재 이전 현장과 혜초가 본 서역 상황
2. 고선지 장군의 토번 連雲堡 원정 이전의 당과 토번 관계
제6장 토번 연운보 정벌을 위한 고선지 부대 행군 루트
1. 쿠차에서 特勒滿川(五識匿國)까지의 행군 루트
2. 특륵만천에서 토번 연운보 앞까지 행군 루트
3. 고선지 장군의 토번 연운보 공격과 함락
제7장 고선지 장군의 소발률국 진격과 소발률국 함락 과정
1. 고선지 장군의 탄구령 정복
2. 고선지 장군의 소발률국 정복
3. 토번 연운보 함락과 소발률국 정벌 후 고선지 장군의 개선
4. 안서사진절도사 부몽영찰의 공갈과 협박
제8장 고선지 장군의 안서사진절도사 발탁 배경
1. 안서사진절도사 고선지 장군
2. 안서사진절도사 고선지 장군의 서역 경영
제9장 당과 서돌궐 관계의 역사적 배경
1. 당 초기의 서돌궐 관계
2. 당에 의한 서돌궐 분열
3. 당 중종 시대의 서돌궐 관계
4. 당 현종 시대의 서돌궐 관계
5. 당과 돌기시소녹, 서역 제국의 관계
6. 당과 서역 제국 관계
7. 당과 돌기시소녹의 충돌
8. 돌기시소녹 사후 도마지와 막하달간의 권력 투쟁
9. 천보년간 초의 서역 판도 분석
제10장 고선지 장군의 제1차 석국 정벌 배경과 그 영향
1. 고선지 장군의 석국 정벌 배경
2. 고선지 장군의 석국 정벌 이후 행적
3. 右羽林大將軍 고선지의 행적
제11장 고선지 장군의 제2차 석국 정벌 배경과 그 영향
1. 그 무렵 이슬람 세계
2. 고선지 장군과 아랍연합세력의 전투 배경
3. 고선지 장군이 아랍연합세력에 패퇴한 후 그 영향
4. 하서절도사 고선지의 행적
제12장 고선지 장군의 안녹산 반란 진압 과정 분석
1. 密雲郡公 고선지 장군의 행적
2. 討賊副元帥 고선지 장군의 반란군 진압 과정
3. 고선지 장군의 전술상 潼關으로 퇴각 이유
제13장 결론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