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하되 소속되지 않는’ 태도로
한국의 근대성을 밝히는 것을 주 과제로 삼은 연세근대한국학총서의 하나로 『지배의 논리 경계의 사상』이 출간되었다. 이 총서는 개항을 전후로 한 근대계몽기 문학의 특성을 밝히는 데 주력하며 일방성보다는 상호 이해와 소통을 중시하는 통합적인 결과물이다.
저자는 식민지 시대 이후 분단과 전쟁과 독재 그리고 천박하고 탐욕스럽고 야만적인 자본주의화 과정에서 형성된 세력이 이 사회를 지속적으로 지배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불길한 생각에 압도되어 제대로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고 말한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책을 읽고 뭐든 끼적이는 일뿐이었다는 것을 밝히며 “문학이야말로 혁명의 본질”이며 “문학을 잃어버리는 순간 혁명은 죽는다”는 사사키 아타루(『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의 말을 인용한다.
이는 변화를 향한 요구가 소용돌이를 이루고 있는 한국 현대사의 변곡점에서 한 권의 책으로 엮는 글들은 과거에게 던진 질문이 현재에 얼마나 유효할 것인지 가늠해 보려는 의지의 표출이다.
이 책은 문학을 근간으로 하되 역사를 시야에 두고서 지배의 논리를 보여주며 ‘소재하되 소속되지 않는’ 태도로 경계의 사상을 모색한다.
『태극학보』에서 읽은 ‘지배의 논리’
근대계몽기의 담론장에서 『태극학보』의 ‘국민’ 담론이 ‘망국’이라는 위기 상황 아래에서 형성된 것인 만큼 근대국민국가가 위기 상황을 지속적으로 조성함으로써 ‘국민’의 존재를 자연화〓영속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국가’가 ‘처음부터’ 희생을 개인에게 강요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국가’는 권력을 소유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사이의 힘의 관계의 표현이며, 그 표현이 제도화한 것이다. ‘제도화한 것’이라 했거니와, 따라서 그것은 사후적으로 구성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순간 ‘신화’가 되어 비판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해 버릴 정도로 무소불위의 존재가 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택할 수 있는 길은 ‘국민-국가’라는 근대적 개념이 이곳의 지적 토양에서 어떻게 발아되고 싹을 틔었는가를 계보학적으로 추적하는 것이다. 『태극학보』라는 유학생 집단의 매체에서 ‘국가’와 ‘국민’이 어떻게 현상하는지를 찾아보려 한 것도, 그 개념들의 ‘구성 과정’을 포착하기 위해서였다.
『태극학보』는 단순 명료하게 국가라는 ‘절대적 선’에 복종하는 ‘신실한 국민’이란 무엇이며, 그 양성 방법은 무엇인지에 관한 논의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 “국가는 갈등을 벌이는 집단들로부터 초연하지도, 그 집단들 사이에서 공정하게 판단하지도 않는다. 본성상 국가는, 또 다른 과정이 도래하도록 앞의 경제 관계의 변화를 추구하는 또 다른 계급에 의해서 경제 관계의 어느 한 과정의 의무 권리 체계가 침해되지 않도록 보호하는 데 사용되는 강제권력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진술의 참조하면, 근대계몽기 『태극학보』의 ‘국민’ 담론이 추상적이자 일방향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태극학보』의 ‘국민’ 담론에서 문명과 야만의 경계는 주체와 타자, ‘국민’과 ‘비국민’의 절단선으로 치환되며, 여기에서 동화와 차별화는 동전의 양면처럼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국민’ 담론은 지금도 모든 소수자의 주장이나 논리를 단숨에 삼켜버린다는 점에서 치밀한 비판을 필요로 한다. 『태극학보』의 ‘국민’ 담론이 근대계몽기 담론장에서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식민지 시대와 해방 후 지금-여기에서 어떻게 변주되고 있는지, 한국 근대사의 ‘특수한’ 국면을 대변하는 것인지, 어떤 점에서 근대국민국가의 ‘일반적’ 성격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아울러 고찰해 보아야 한다. 근대계몽기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국민(주의)’의 실체와 직면함으로써 ‘국민’ 아닌 ‘개인’의 발견은 어떻게 가능한지를 모색해야 한다.
근대와 해방 이후, ‘경계의 사상’들
이 책의 제1부에서는 『태극학보』와 『독립신문』을 중심으로 위기의 시대와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문명한 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조선 지식인들의 열망을 보여주고 있으며, 제2부에서는 시대를 반영한 문학 텍스트를 통해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의 모순을 직시하고 이를 돌파할 수 있는 동력으로 삼으려 한다. 제3부에서는 ‘국민’과 ‘국어’ 그리고 ‘국민문학’이라는 담론으로 국가의 종교화, 정치의 미학화를 고려하여 ‘국민이란 무엇인가’,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와 개인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되어야 하는가’를 다시 물을 수 있어야 한다고 설파한다. 마지막 제4부에서는 해방 이후의 사상들을 다뤘다.
목차
책머리에
제1부
제1장 근대계몽기 ‘국민’ 담론과 ‘문명국가’의 상상-『태극학보』를 중심으로
1. 문제 설정
2. 위기의 시대, 독립 국가의 길
3. 국가유기체론과 애국심의 ‘자연화’
4. ‘국민’ 교육과 ‘국민’의 언어
5. 마무리
제2장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의 문명화와 조선의 길-『독립신문』을 중심으로
1. 소용돌이 속에서
2. ‘일본’이라는 거울
3. 『독립신문』이 그린 메이지유신 이후의 일본상
4. ‘일본 개화의 기초’와 조선의 길
5. 마무리-깨진 거울 속의 조선
제3장 ‘국어’의 독립과 국가의 독립-『독립신문』의 국문론
1. 왜 ‘띄어쓰기’인가
2. ‘야만의 언어’에서 ‘문명의 언어’로
3. 표음문자〓문명, 표의문자〓야만이라는 인식
4. ‘국문’의 정립과 문법의 통일
5. 마무리
제2부
제4장 ‘일청전쟁’이라는 재난과 문명세계의 꿈-『혈의 누』를 다시 읽는다
1. 프롤로그
2. ‘일청전쟁’의 포화 속에서
3. 누가, 무엇이 재난을 초래했는가
4. 예기치 않은 여행 또는 ‘용궁의 꿈’
5. 에필로그
제5장 시인의 번역과 소설가의 번역-김억과 염상섭의 「밀회」 번역을 중심으로
1. 1908년 동경의 하숙방 풍경
2. 후타바테이 시메이의 투르게네프 번역
3. 『사냥꾼의 수기』와 「밀회」
4. 김억의 「밀회」와 염상섭의 「밀회」
5. 마무리
제6장 청량리 또는 ‘교외’와 ‘변두리’의 심상 공간-한국 근대문학이 재현한 동대문 밖과 청량리 근처
1. 『무정』ㆍ영채〓계월향ㆍ청량사
2. 청량리, 전차가 발견한 ‘경성’의 교외
3. ‘야외 산보’의 미학과 그 이면
4. 청량리역과 그 근처, ‘출발점/종착점’의 상상
5. 청량리’라는 텍스트를 다시 읽기 위하여
제3부
제7장 ‘국민문학’과 새로운 ‘국민’의 상상-조선문인협회 현상소설 입선작 「연락선」과 「형제」를 중심으로
1. ‘국민 신화’의 파국과 ‘불의의 별리’
2. 『국민문학』의 ‘국민문학’ 구상과 실천
3. ‘내지’ 또는 ‘국민화〓신민화’의 체험/학습 공간
4. ‘국민’, ‘피’로 맺어진 형제?
5. 마무리
제8장 국민학교, ‘황국신민’의 제작 공간-이이다 아키라의 『반도의 아이들』을 중심으로
1. 문제 설정
2. 재조일본인 교사 이이다 아키라의 국가관과 교육관
3. 『반도의 아이들』 개관
4. 교사, ‘천황〓일본정신’의 대리인
5. ‘국어’와 ‘국민’ 그리고 구별짓기
6. 마무리―‘하나의 국민’이라는 환상의 상흔
제9장 어느 법화경 행자의 꿈-일제 말기 춘원 이광수의 글쓰기에 나타난 개인과 국가
1. 문제 설정
2. 춘원과 『법화경』
3. ‘八紘一宇’ 또는 극락세계의 현실적 비전
4. 행자의 길, ‘국민’에 이르는 길
5. 맺음말
제4부
제10장 해방 공간, 전단지의 수사학
1. ‘8ㆍ15’의 빛과 그늘
2. 전단지라는 미디어
3. 갈등과 대립의 언어 또는 ‘삐라’의 수사학
4. 전단지, ‘불길한 아우성’의 의미
제11장 삐라, 매체에 맞서는 매체-해방 직후 소설을 통해 본 삐라의 정치학
1. 문제 설정
2. ‘삐라 정치’ 시대
3. ‘삐라 학습’과 의식의 변화-‘진보적 민주주의자’의 경우
4. 삐라를 통한 정치적 각성-‘민족주의자’의 경우
5. 마무리
제12장 기념관에 갇힌 장소와 기억-‘4ㆍ3평화기념관’과 기억의 정치학
1. ‘4ㆍ3사건’의 현장에서
2. ‘4ㆍ3평화기념관’과 기억의 재현
3. 기념관과 기억의 상품화, 기억의 공동화
4. 내부식민지의 기억과 국민국가의 서사
5. 국민의 역사로 회수되지 않는/못하는 기억들을 위하여
간행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