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언어자들의 억압된 기억을 들추다
모어인 한국어 못지않게, 아니 어떤 경우에는 한국어보다도 더 일본어를 잘 읽고 쓰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식민지에서 태어나 식민종주국이 만들어 놓은 교육제도와 문화적 환경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이중언어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 대다수에게 근대적 지식과 정보의 획득, 그리고 문학입문의 통로는 일본어였다. 식민지 시기뿐 아니라 해방 이후에도 일본어 서적을 읽었고, 일본어를 통해 많은 지식과 정보를 얻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에는 ‘일본어’와 관련된 그런 이력(履歷)과 문화 경험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거나 정당화할 수 없는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몸과 뇌리에 각인된 문화적 기억은, 반일(反日)과 민족주의라는 대타자의 위압에 짓눌려 수면 밑으로 가라앉아야 했다.
모어와 식민종주국 언어의 관계가 단순히 정치적 강제에 의한 ‘박탈’과 ‘(해방 후의) 탈환’의 단선적 과정일 뿐이라면 언어들 사이에서 ‘재-주체화’ 과정을 겪을 일도 없고, ‘식민화된 주체’라는 개념도 굳이 따로 만들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식민지 경험과 포스트식민 사회의 기억의 정치학이 그렇듯이, 모어와 식민종주국의 언어 사이에 형성된 박탈과 탈환의 과정, 혹은 내상(內傷)과 치유의 흔적, 모방과 동일시 그리고 억압과 배제를 통해 드러나는 욕망의 문제는 결코 간단하지 않다. 무엇보다도 전후세대의 여러 증언과 다양한 전후문학 텍스트들에 나타나는 기억과 재현의 균열과 중층성이 그 ‘간단하지 않음’의 확실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억압된 것은 사라지지 않고 저장되었다가 다시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민다. 억압된 그들의 문화적 기억은 사회?문화적 금기의 무거운 쇠뚜껑을 열고 다시 이야기를 시작한다. ?전후문학을 다시 읽는다-이중언어?관전사?식민화된 주체의 관점에서 본 전후세대 및 전후문학의 재해석?(소명출판, 2015)은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려는 작은 시도이다.
전후세대의 새로운 정의와 전후문학의 재맥락화
이 책은 저자인 한수영 교수(연세대 국문과)가 전후문학과 전후세대에 관해 진행해 온 10년간의 연구성과를 결집한 학술서이다. 저자는 지난 10년간, 우리 전후문학과 전후세대를 새로운 관점과 방법론으로 해석할 필요성을 국문학계에 제출해 온 한편, 손창섭, 하근찬, 선우휘, 김수영, 유종호, 장용학 등 대표적인 전후세대 문인과 그들의 텍스트를 재해석하는 작업을 꾸준히 진행해 왔다.
이 책에서 말하는 ‘전후세대’는 ‘한국전쟁 직후에 등단한 문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1920~30년대에 태어나 식민지의 교육과 문화 및 사회 제도 아래에서 자라난 세대’이다. 그럼으로써, 등단 시기가 아닌 문화사적 배경과 조건을 중심으로 전후세대에 접근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전후세대를 한국전쟁 및 실존주의 냉전 등과 결부지어 해석하던 관행을 탈피하고, 그들을 청소년기의 ‘식민지 경험’과 결부지어 해석한다. 이것은 기존의 민족주의나 역사주의적 접근, 탈식민주의적 해석 방식이 지닌 한계를 비판적으로 극복하여, 한국 근대문학사에서 전후문학이 지닌 의미와 가치를 근본적으로 다시 자리매김 시키고 있다.
저자는 이 책을 구성하는 새로운 방법론적 개념으로 3가지를 꼽았다. 첫째 이중언어자로서의 전후세대, 둘째 관전사(貫戰史, trans-war), 셋째 식민화된 주체(colonized subject)이다.
‘이중언어자’ 개념은 전후세대는 일본어와 한국어 사이를 ‘코드스위칭(code-switching)’했던 ‘이중언어자(bilingual)’를 뜻한다. 전후문학을 심층적으로 이해하고 한국 근대문학사에서 새롭게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전후문학의 주체였던 전후세대의 이러한 언어적 정체성을 가장 먼저 검토해야 한다.
‘관전사’ 개념은 전후세대의 가장 큰 역사적 경험이자 내상(內傷)의 진원지였던 ‘한국전쟁’을 전후세대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을 뜻한다. 이를 위해서는, 그들의 선체험인 ‘태평양전쟁’과 ‘중일전쟁’의 경험과 인식을 놓쳐서는 안 된다. 즉, ‘한국전쟁’을 인식하는 선재(先在)하는 경험과 사유로 식민지 시기의 전쟁을 겹쳐 읽어야 한다. 그래서 관전사라는 방법적 개념을 차용해, 전후문학에 나타난 ‘한국전쟁’의 표상과 인식이 그 이전의 전쟁들과 어떤 상관관계를 가지는가를 검토하고 있다.
‘식민화된 주체’ 개념은 식민지의 청소년으로서 ‘제국’이라는 대타자와의 교섭과 길항을 통해 ‘식민지 주체’로 형성되었던 ‘전후세대’가, 해방 이후 다시 ‘대한민국’이라는 ‘국민국가’의 단일언어 사회를 향한 이데올로기와 갖가지 동원이데올로기에 노출되면서 ‘재-주체화’되는 과정을 설명해주고 있다.
억압되었던 전후세대의 이야기
책의 곳곳에는 전후세대 문인과의 인터뷰 및 그들의 회고록과 자서전, 에세이, 일기, 대담 등에서 추출한 풍부한 ‘증언’들이 들어 있다. 그 ‘증언’과 ‘회고’를 따라가다 보면, ‘식민화된 주체’로서 전후세대가 감당해야만 했던 여러 가지 억압과 저항, 오인(誤認)과 전치(轉置), 내상과 치유, 모방과 동일시, 단절과 반복 등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들은 유소년기에 제국의 언어로 세계와 접속해야 했으며, 청년기에 접어들자 일본의 전쟁에 동원되어 군인과 위안부로, 혹은 노무자로 중국과 남태평양 등지로 끌려가야 했다. 해방을 맞은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격렬한 좌우 대립의 소용돌이와, 마침내 그 끝에 터진 전쟁이었다. 인생의 황금기라고 할 30, 40대에 이들은 길고 긴 분단체제의 터널 속에서 독재와 혁명, 쿠데타로 이어지는 정치적 격변을 온몸으로 떠안아야 했다. 경제개발이라는 명분 아래 이뤄졌던 여러 형태의 국가 동원, 금욕에 가까운 갖가지 통제와 규율의 핵심 대상이 되었던 것도 이들이었다.
강요와 억압, 순치와 내면화의 과정에서 말끔히 처리되거나 사라지지 않는 의심과 욕망의 잉여들은 미처 발화되지 못한 채 흩어지거나, 의식의 깊숙한 곳에 가라앉는다. 저자는 그 흩어지는 이야기와 무의식의 창고를 들여다보는 것이, 이 세대들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전후문학을 다시 읽는다-이중언어?관전사?식민화된 주체의 관점에서 본 전후세대 및 전후문학의 재해석]을 통해 저자가 진짜로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전후세대’가 아니라 지금의 우리 자신들의 모습이다. 그는 전후세대들을 통로로 삼아 우리의 언어, 우리의 문학, 혹은 우리의 감수성은 어디로부터 와서 어떻게 형성된 것인가를 탐구해 보고 싶었다고 밝히고 있다. 우리 자신들 모습의 원형을 알아보기 위해서라도 이 책에서 전하는 전후세대와 전후문학의 새로운 이야기들에 귀 기울여보길 바란다.
목차
책머리에
서설
유년의 기억으로부터
전후세대의 체험과 기억의 균열
전후문학에 대한 새로운 질문
제1장 전후문학의 재해석을 위하여
1. 전후문학 연구사의 비판적 검토
1990년대 이후 전후문학 연구의 흐름과 그 공과(功過)
세대와 언어정체성에 관한 새로운 접근들
전후문학 연구를 위한 새로운 지표의 필요성
2. ‘국민문학’이념의 균열과 삭제된 주체로서의 전후세대
4?19세대의 전후세대 규정과 의미
‘국민문학’ 과 근대 한국어의 이념
3. 전후문학을 다시 읽기 위한 세 가지 좌표
이중언어자로서의 전후세대
관전사와 기억
‘식민화된 주체’로서의 전후세대
제2장 이중언어자로서의 전후세대
1. 전후세대란 누구인가?
전후세대의 범위와 기준
전후세대의 교육?문화적 환경
2. ‘이중언어’ 글쓰기 맥락 안에서의 전후세대
근대문학과 이중언어적 상황
일제 말 이중어 글쓰기에 관한 시각
이중언어 글쓰기 맥락에서의 전후세대와 전후문학
제3장 전후세대의 목소리
1. 전후세대가 기억하는 식민지와 해방 전후
일본어로부터 한글로의 코드전환 과정
감각과 기억에 남은 일본어와 식민지 교육의 흔적
독서와 매체, 그리고 수업
2. 이중언어세대의 자의식
모어 순혈주의와 윤리적 자의식
이중언어 문제의 전치(轉置)로서의 일산(日産) 한자어와 토착어
전후세대의 인정투쟁과 오도된 보편성
혼종적 주체의 저항
제4장 관전사와 기억
1. 한 전전(戰前)세대 비평가의 전쟁인식과 관전사의 논리-백철의 전후비평
‘전후’ 개념의 문제성
중일전쟁과 소설 ?전망?
해석주체의 균열
근대주의와 보편-전쟁을 둘러싼 미망
2. 파시즘과 자유주의-선우휘 소설에 나타난 관전사적 인식과 전쟁의 논리
?불꽃?의 구조와 기억의 서사
집단과 개인, 그리고 ‘자유’의 전쟁
3. 국가 동원 체제로서의 전쟁과 ‘국민되기/거부하기’-하근찬
?수난이대?의 재해석과 국민만들기의 문제
동원이데올로기와 폭력
제5장 식민화된 주체와 전후문학
1. 식민화된 주체와 언어적 타자의 위치-손창섭
실어증과 침묵-이중언어자의 대리표상들
포스트식민 사회의 식민화된 주체
언어적 타자로서의 이중언어자의 위치
2. 근대문학을 둘러싼 ‘언어’의 유곡(幽谷)-유종호의 초기비평에 나타난 언어 인식과 비평가의 무의식
근대 ‘문학언어’의 질곡에 대한 문제의식
‘토착어’와 근대문학이라는 모순율
이중언어에 관한 비평가의 의식과 무의식
상상하는 ‘모어’의 타자들
3. 유년의 입사형식(入社形式)과 기억의 균열-하근찬의 유년체험의 형상화와 식민화된 주체
억압된 것의 귀환과 기억의 균열
회고의 주체와 재현의 주체
식민지 소년의 성적 환상과 그 좌절
불러내기와 지우기-기억이라는 이름의 마술
입사(入社)로서의 미적 체험과 이중언어
4. 한 보편주의자의 스키쪼프레니아-장용학의 국민문학론과 ?원형의 전설?
‘세계로부터의 귀환’이라는 자기의식
장용학의 국민문학론과 언어 인식
자기정체성에 관한 질문의 긴 여정-?원형의 전설?
5. 식민화된 주체와 저항-김수영의 이중언어 인식과 내파(內破)의 논리
김수영의 해프닝이 야기하는 문제성
김수영과 일본어, 혹은 언어해방의 불/가능성
금기의 환유체계, 혹은 반일(反日)과 반공(反共)의 허구성
이중언어 상황과 구속/해방의 변증법
참고문헌
간행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