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언어학은 최소 일정한 언어적 규칙을 공유한다는 점에서만큼은 평등하다고 가정되는 개인, 그리고 그러한 개인들로 구성된 균질적인 공동체를 전제한다. 물론 이때의 평등한 개인은 근대적 주권자로서의 ‘국민’에, 균질적 공동체는 ‘국민국가’에 대응되는 것이며, ‘국민’이 공유하는 것으로 가정되는 언어의 내적 규칙은 ‘국어문법’에 다름 아니다. ‘국어문법’은 이와 같이 근대적 개인과 그들의 (정치) 공동체인 ‘국민국가’를 요청한다. 반대로 ‘국민국가’ 역시 구성원의 동질성을 확인해 줄 수 있는 것의 하나로써 ‘국어문법’을 필요로 한다. 최소한 ‘국어’의 내적 규칙을 공유한다는 점에서만큼은 그들 모두가 동등한 ‘국민’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근대언어학이 언어 내적 사실에 집착했던 것은 중세적 세계관의 극복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근대 이전에 언어와 문자에 대한 전문적 담론은 ‘성스러운’ 고전 텍스트 해독에 골몰해 있었다. 이에 비해 근대언어학은 성스러운 고전어나 저잣거리의 상스러운 말이나 내적 규칙에서는 우열의 차이가 없다는 것을 밝혀냈다. 따라서 언어 내적 규칙에 대한 천착은 곧 속어의 복권을 의미하는 것이고 또 그 말을 쓰는 사람들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성스러운 고전 텍스트의 언어든 연애편지에 동원된 저속한 문장이든, 또 천리(天理)를 깨친 성현의 말씀이나 이문(利文)에 눈이 먼 장사치의 말이든, 언어적 규칙에 있어서만큼은 우열을 가릴 수 없다는 발견의 정치사회적인 함의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언어적 근대’를 찾아서
1990년대 이후 ‘근대’라는 개념은 인문사회과학계에서 하나의 화두와도 같은 역할을 해 왔다. 이는 근대에 형성된 제도나 생활 습속들이 근본적으로는 큰 변화 없이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고 있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국어’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이들 사이에서는 ‘언어적 근대’에 대한 논의가 빈약했던 것이 사실이다. 물론 ‘국어사’라는 연구 영역을 통해 한국어의 역사가 다루어지고 여기서 ‘근대 국어’가 주요한 주제로 제기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때의 ‘근대’는 여타의 인문과학에서 사용하는 개념과는 큰 차이가 있다. 예컨대 ‘근대 사회, 근대 사상, 근대 문학, 근대 정치, 근대 과학, 근대 교육, 근대 미술’ 등등의 ‘근대’가 서로 상당한 연관관계를 가지고 있는 반면 ‘근대 국어’는 앞의 ‘근대’ 개념과 내적 연관관계를 가진다고 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국어사’에서 다루는 ‘근대 국어’는 대개 17세기 초부터 19세기 말 사이의 한국어를 가리키는데, 이 시대 구분이 언어 외적 요인들과는 무관한 언어 내적 사실, 즉 음운이나 문법 체계들의 변화를 기준으로 삼기 때문이다. 이렇듯 역사를 다루면서도 결코 언어 외적 환경과 맥락을 다루지 않는, 혹은 다룰 수 없는 현재의 언어 연구 풍토가 어디서 ‘기원’하는가 하는 질문 앞에서 ‘근대’라는 문제 설정에 다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근대’라는 문제 설정이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러나 이전 시기와는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생활 습속과 의식의 기원을 추적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본서는 바로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서부터 출발한다. 근대 민족국가의 성립 과정에서 민족어에 대한 자각과 인식, 그리고 이에 기반을 둔 민족적 정체성 형성이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식의 논의는 상식처럼 통용되고 있으나 정작 ‘국어’ 연구자들은 이에 대해 별반 발언을 하지 않고 있다. 보다 정확히 말한다면 기존의 국어학계는 이런 논의에 개입할 이렇다 할 방법론이나 개념적 도구를 갖고 있지 못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 보니 근대라는 문제 설정 속에서 언어에 접근하는 여타 인문사회과학자들의 논의를 인정할 수도, 또는 반박할 수도 없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일종의 토론 부재의 상태인 셈이다. 이 책의 발간이 반가운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상상의 공동체’가 형성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언어’이지만, 언어를 다루는 이들에게는 ‘민족’이 상상된 것인지 엄연한 실체인지를 논의할 개념적 도구가 없다. 그저 고대 국어로부터 중세, 근대 및 현대 국어로 면면히 이어져 오는 국어의 음운, 형태, 문법적인 변화를 따져 볼 뿐이다. 사실 이런 관점에서는 19세기 말 이후 우리가 사용하는 말에 특별한 질적인 단절이란 있을 수 없다. ‘근대어의 탄생’이라는 표현 자체가 어불성설인 것이다. 근대에 들어서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한국어가 생겨났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실 ‘근대어의 탄생’이라는 표현은 근대에 나타난, 언어에 대한 새로운 인식, 그리고 이에 기반을 둔 어떤 의식적 노력을 강조하고자 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온당할 터이다. 이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고 특별할 것도 없었던 모어에 대해 새로운 인식이 생기고 그에 따른 어떤 의식적 노력이 사회 운동의 형태로까지 표출되었으며, 그리고 이 과정에서 특히 인쇄 매체상의 변화, 즉 표기의 수단이나 그 방식이라든가 공적 문체 등에 일정한 변화가 이루어지기도 한 것이 사실이다. 물론 이는 매우 근대적인 현상이다. 언어적인 면에서 전근대를 특징짓는 현상은 라틴어, 또는 한문 같은 보편어가 문어의 중심에 위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경우, 이와 같은 언어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그에 따른 의식적 노력이 시작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그리고 이러한 흐름이 하나의 사회 운동의 차원으로 표출되는 것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본서는 그 근원을 주시경에 주목하여 서술하고 있다. 주시경이 이른 시기부터 ‘국문’과 ‘국어’에 대한 자각을 통해 지속적인 발언을 했으며, 또 ‘주시경 일파’라 부를 수 있는 집단을 형성해 사회 운동적 차원에서 언어 문제에 접근했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기 때문이다. 식민지 시기의 이른바 ‘한글 운동’은 물론이고 해방 후의 언어 운동 및 정책 역시 그의 직접적인 제자들이나 그의 이론을 따른 이들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점(이는 근본적으로 남한이나 북한이나 마찬가지이다) 역시 주시경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주시경에 주목하는 마지막 이유는 ‘언어에 대한 새로운 의식’이라는 관점에서 주시경에 접근했을 때, 앞서 언급한 일종의 토론 부재의 상황을 타개할 여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주시경이라면 국어학계에서도 이미 수많은 업적이 나와 있으며, 언제라도 토론에 나설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어적 근대’라는 문제 설정을 통해 주시경에 접근한다면, 기존 국어학계의 성과를 살리면서도, 근대의 초입에 어떠한 새로운 인식과 의식적 노력이 언어와 관련해서 있었고, 결국 이것이 현재에까지 어떻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를 해명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목차
머리말
제1장 ‘언어적 근대’라는 문제 설정
1. 왜 ‘언어적 근대’인가
2. ‘상상의 공동체’와 ‘하나의 언어’라는 믿음
3. 근대의 탐사-개념사와 담론분석
제2장 ‘언어적 근대’를 찾아서-동아시아의 경우
1. 동아시아의 전통적 담론
2. ‘언문일치’와 언어적 근대
제3장 ‘국어’를 찾아서
1. ‘국문’과 ‘국어’의 사이
2. ‘국어’의 발견
3. 자율적 실체로서의 언어
제4장 근대적 개인의 발견과 ‘국어’
1. ‘근대적 주체’와 ‘국문’의 관계
2. 민족적 서사와 주체의 문제
3. 근대적 주체의 양상과 근대언어학
제5장 ‘국어’의 지층들
1. 원소(元素)와 합음, 소리의 층위
2. 원체와 변법, 그리고 문장의 층위
3. 근대언어학과 균질화라는 문제
제6장 타자의 시선과 ‘국어’의 발견
1. 외부와 내부의 시선
2. 내적 전략-글쓰기 문제
3. 외적 전략-‘권위’의 형성
제7장 ‘국어’의 구축
1. 주시경 ‘씨난’의 재검토
2. 주시경의 ‘씨난’과 『말모이』의 관계
3. 언어의 구축
제8장 맺음말 은유로서의 언어
참고문헌
부록 1. 보론:주시경 연구사
부록 2. 주시경 연구 논저 목록
부록 3. 주시경 연보
간행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