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에서 위인으로』는 저자 김성연의 박사학위 논문을 수정하고 보완한 것이다. 이 책은 대다수의 한국인이 성장기에 읽었던 ‘세계위인전기 전집’의 기원을 실증적으로 정리하고, 그 탄생이 함축하고 있는 세계관ㆍ인간관ㆍ가치관의 변화를 담론적으로 밝히고 있다. 오늘날의 형태에 가장 근접한 근대적 위인의 개념과 전기의 장르적 변화, 그리고 전집의 구성 방식을 근대화와 식민화라는 역사적 조건 속에서 입체적으로 접근한 최초의 연구서로 평가된다.
세계 위인전기 전집의 기원을 찾아서
한국인이라면 링컨, 퀴리 부인, 슈바이처 등의 서양 인물에 관한 이야기 중 인상적인 에피소드나 명언구를 한두 가지는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세대를 초월해 읽히는 위인전기 목록 중 많은 인물들이 부동의 자리를 차지한 채 고정되어 있다. 대체로 초인간적 인격과 천재적 재능으로 무장한 위인에 관한 서사는 소설보다도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 쉬웠고 따라서 위인들은 독자에게 희망과 좌절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우리는 왜 그 책들을 읽어야 했을까? 그리고 언제부터 읽기 시작한 것일까? 인물 서사는 교육계나 출판계에서 주요한 역할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본격적으로 연구되거나 논의되지 못했다. 『영웅에서 위인으로』는 이러한 문제의식에 착목하여 출판되고 독서되어 온 위인 전기 전집의 기원을 찾아가고자 했다.
‘구국의 영웅’에서 ‘직업적 위인’으로
1900년대 국권 침탈의 위협 속에서 독서계의 중심을 차지했던 베스트셀러는 단연 구국의 영웅을 주인공으로 한 역사전기물이었다. 민족정신의 수호자를 자임하던 지식인들은 을지문덕, 잔다르크, 비스마르크 등 내외국의 전쟁영웅ㆍ정치영웅을 비롯한 국가적 영웅들에 관한 서사를 신문, 잡지, 단행본 등 인쇄지면을 통해 쏟아냈다. 하지만 1910년 일본의 통치하에 들어서자 이들 도서는 금서 처분을 받는다. 식민지인이 된 조선인의 욕망은 이제 또 다른 방식으로 발현되기 시작한다. 총독부의 검열도 통과할 수 있고 문화 민족주의적 의도로 실현시킬 수 있는 타협된 방식으로 전기는 변모한 것이다. ‘역사전기물’은 개인의 노력과 도덕성에 중점을 둔 ‘수양총서’로 변신했다. 대표적으로 링컨의 존재 의미는 ‘자유나 해방’ 등의 가치가 아닌 ‘가난한 집 아이에서 대통령으로 도약한 성공자’로 요약되었으며 따라서 성장기 서술에 집중되었다. 당시 전기는 지식인 독서물에서 출발했으나 점차 아동물로도 정착하게 되고, 따라서 논쟁의 대상이라기보다는 교육의 자료가 되었다. 동시에 사회 문제는 개인의 문제로 축소되었으며, 공공적 논의의 자리를 개인의 수양론이 차지하게 되었다. 조선인의 정치적 개입이 차단된 식민지 현실에서 사회적 서사와 욕망이 개인의 것으로 환치되는 순간이다.
수양론과 공인의 탄생
더불어 이 책은 1910~1945년 사이 가장 많이 번역된 인물 서사가 바로 미국 국부(國父) 벤자민 프랭클린의 자서전이었다는 사실을 밝힌다. 그의 자서전은 일본을 거쳐 조선에 상륙하는데, 정치인, 경제인, 지식인, 과학기술자 등 다면적 정체성을 가진 그는 조선에서 ‘근면을 통해 부와 명예를 획득하고 공익을 실현한 지식인’으로 조명되었다. 소설가 이효석의 아버지 이시후와 최남선, 그리고 김억 등 당대 최고의 지식인, 출판인 혹은 교육자들이 이 자서전의 번역가였다는 사실 또한 이채롭다. 최남선은 백 년 전 잡지 『소년』에 ‘프랭클린 플래너’의 기초적 버전을 부록으로 실어주며 독자에게 이를 활용하여 자신의 일상을 규율하고 관리할 것을 권고했다. 플랭클린 플래너는 오늘날에도 연초면 어김없이 구매 목록에 오르는 상품이다. 근대 이후 사회적으로 권장되어온 이상적 인물에 관한 서사들은 우리의 이상 뿐 아니라 일상에도 영향을 미쳐오고 있는 것이다.
이는 20세기 초 자조론과 진화론의 붐 속에서 싹튼 수양론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서구 열강의 역학 속에서 생존을 위협받던 동양의 지식인들은 사무엘 스마일스의 『자조론』과 다윈의 진화론을 각기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와 ‘약육강식, 적자생존’이라는 문구로 요약하여 적극 받아들이고 있었다. 사농공상의 신분 질서가 와해되고 식민지 자본주의가 진행되어가던 시대에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모색하는 강연과 논쟁이 이어졌고, 그에 대한 응답의 하나로 개인적 성공과 사회적 이익을 동시에 구현했다고 평가받는 인물들이 ‘공인’으로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이다.
동아시아 삼국, 그 욕망의 교집합
그런데 오늘날 한국인이 공유하는 소위 ‘세계 위인의 리스트’는 일본이나 중국과는 유사한 반면 영미 유럽권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한ㆍ중ㆍ일이 가지고 있는 유사성은 동아시아 삼국의 근대화가 시작된 초기에 이미 형성되었다. 한국의 경우 근대 초 서양 문물의 수입 경로가 대체로 일본, 더러 중국을 거친 것이었으며, 최초의 번역위인전기총서인 한성도서본 역시 일본 출판사 하쿠분칸(博文館)의 세계역사담의 번역본인 경우가 많았다. 이상적 인물상에 관한 서사로 제시된 위인들은 동아시아의 공통적인 근대화ㆍ서구화 욕망의 상징적 산물이며, 일본어본에서 한글본으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취사선택된 인물 목록과 서사 초점의 변화는 한국적 특수성을 설명해주는 단서가 된다. 그렇게 유입된 서구 인물 서사를 접한 식민지 조선인은 그에 뒤지지 않는 자국 인물을 제시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이 책은 기존에 사학자로 알려져 있던 산운 장도빈이 근대적 전기물의 출판과 저술에 적극 관여하며 번역 전기와 그에 대응하는 창작 전기물을 남긴 사실을 밝혔다. 현모양처이던 신사임당이 서양 여성 화가 전기의 유입으로 화가로서의 정체성이 부각되고 충무공이던 이순신이 근대 과학 기술자의 전기 유입과 함께 발명가로서 재조명되기 시작한 것도 이 즈음이다.
백년의 교과서, 세계위인전
『영웅에서 위인으로』는 백여 년 가까이 지속되어 온 ‘서양 인물 전기 권장하는 사회’의 역사를 밝히고 있다. 이 책은 ‘번역위인전기총서’의 구성과 서술에 깃든 근대화ㆍ자본주의화ㆍ식민화의 역사와 그것이 각 시대의 독자들에게 역동적으로 향유되었던 메커니즘을 사회문화적으로 밝히고 있다. 엄밀한 사실 고증과 완결된 논의를 갖추어야 하는 논문에 기반한 연구서 형태이지만 다양한 흥미로운 논의의 지점들을 내포하고 있다.
목차
책머리에
Ⅰ 서론
1. 연구 목적과 연구사 검토
2. 연구 대상과 방법론
Ⅱ 위인 개념과 위인전기의 변모 양상
1. 지식인 언설에서의 ‘위인’
1) 위인 개념의 변화
2) 구국의 ‘영웅’에서 입지성공적 ‘위인’으로
3) 세계 문명을 향한 인격 함양론
2. 번역전기물의 생산과 소비
1) 번역전기물의 시대별 변화(1900~1945)
2) 출판시장과 독서 장에서의 입지
3) 대중적 소비 양상
Ⅲ 1910~1920년대 번역 위인전기
1. 장도빈과 근대적 위인전의 정착
1) 번역전기와 창작전기 사이의 진동
2) 서양/조선, 영웅/위인, 노력/성공의 역학
3) 도덕적 성공을 향한 ‘수양총서’
2. 한성도서주식회사와 번역 출판
1) 근대적 기업체형 출판사 한성도서주식회사
2) 한성도서의 1920년대 번역물 출판 의의
3) 번역가의 세대교체
3. 번역 위인전기 총서라는 기획물
1) ‘위인전기 총서’의 출현
2) 하쿠분칸 총서와 한성도서 총서의 비교
3) 번역자 및 번역 원본 확인
4. 1920년대 번역전기의 특징
1) 역사전기에서 인물전기로
2) 1920년대 위인 열전
Ⅳ 이상적 근대 주체 형상과 위인전기
1. 근대 전기와 근대적 위인상
1) 도덕적 성공자
2) 1920년대 번역전기물의 인물 군상
2. 경제적 ‘공인’ : 『프랭크린』
1)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의식과 일상화된 공공성
2) 1910년대 프랭클린:실업의 시대, 일상의 규율자
3) 1920년대 프랭클린:공공심의 자본주의적 실천가
4) 건국의 아버지에서 이상적 실업가로
5) 탈정치화된 식민지 공공담론과 ‘공인’
3. 정치적 ‘공인’ : 『윌손』
1) 동시대 세계 위인의 탄생
2) 국가의 영웅에서 인류의 은인으로
4.국민으로서의 여성의 위치 : 『세계명부전』
1) 메이지 일본과 식민지 조선의 서양여성전기
2) 서양부인의 현모양처 서사
3) 『세계명부전』의 시대ㆍ장르 간 비교
4) 현모양처와 소년
Ⅴ 결론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