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속 고구려’ 제나라 역사를 복원한 역작!
서기 668년 동북아의 강자였던 고구려는 당나라와 신라의 협공 속에, 지배층의 분열로 말미암아 멸망하였고, 수많은 고구려인들은 포로가 되어 당나라로 끌려갔다.
고구려의 멸망과 함께 고구려인의 자취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을까?
이 책의 저자 지배선 교수는 오히려 당나라 내에서의 생존투쟁 가운데 진정 고구려인의 기상과 탁월함이 발휘되었다고 언급한다.
당나라의 변경 방어 정책에 따라 노예 신분이었던 고구려인들이 군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길이 열리면서, 왕모중, 연헌성, 고선지 등은 중국 역사서에 등장할 정도의 위업을 쌓게 된다. 그리고 이들의 뒷 세대 고구려 유민으로서, 중국 역사를 뒤흔든 대표적 인물이 이정기와 그의 아들 이납, 손자 이사고·이사도 4대로 이어지는 가문이며, 55년 동안 그들이 지배했던 제(齊)나라다.
이정기는 하급 군인에서 출발하여, 지금의 산동·하남·강소성의 영역을 아우르는 평로·치청절도사가 되었고, 군사적 재능과 부강한 재력을 바탕으로 제나라 창건의 기틀을 닦았다. 이정기의 아들 이납과 손자들이 지배한 제나라는 고구려인들이 주축이 되어 당나라 황제 및 조정과 때로는 타협하고 때로는 대립하면서 중국에서 자주적인 국가형태를 유지하였던 ‘고구려 유민의 나라’였다.
저자는 이렇게 이정기 4대가 세습하였던 영역이 컸을 때는 15주(州), 작았을 때는 12주를 장악하였다는 점에서 제나라를 동북아의 강국 ‘고구려사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이 평로·치청지역이 황하 하류지역을 망라한 양하(兩河)지역이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양하의 비옥한 농경지를 장악함으로써 제나라의 경제적 토대를 굳건하게 수 있었고, 그 경제력을 바탕으로 고구려 유민의 정체성을 가진채 신라나 발해와 매우 빈번하게 교류하여 교역국가로 강력하게 부상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특히 이정기 이후 이납·이사고·이사도의 4대 모두가 해운육운압신라발해양번등사(海運陸運押新羅渤海兩蕃等使)라는 관직을 가졌던 것은, 이정기 가문이 신라와 발해, 나아가 일본을 상대로 배타적인 교역권을 확보하고 유지하였음을 의미한다. 이로 인해 이정기 가문의 제나라는 다른 어느 절도사들보다 경제적인 부의 확대재생산을 지속적으로 만들 수 있었다.
이는 이정기 가문이 많은 절도사 중에 오랜 세월 동안 당에 대항할 수 있는 강력한 군사력을 확보할 수 있었던 사실과 연결된다. 신라나 발해와의 교역을 통해 얻은 많은 경제적인 수익을 이정기 가문이 모두 독차지하였음은 물론이다. 이정기 가문이 원하기만 한다면 신라와 발해와의 교역량을 조절할 수도 있었다. 그 결과 신라나 발해인이 산동반도의 해안에서 해상 네트워크를 활용하면서 집단 주거지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819년 이정기 가문의 마지막 지배자인 이사도가 선무·위박·의성·무령·횡해의 5절도사 군대의 포위 공격 속에, 부하 유오(劉悟)에게 살해 당함으로써 고구려 유민 이정기 4대가 지배했던 제나라는 붕괴되었다.
이후 제나라 지역 지배를 위해 당 조정은 고심하였다. 그 결과 제나라를 마총·설평·왕수가 각각 다스리는 3개 절도로 나눔으로써 다시는 그와 같은 강력한 국가가 지방에서 출현하지 않도록 하였다. 또한 역사서인 『구당서』 등에 이정기 일가를 청주·운주를 훔쳤고, 흉악무도하고 배반을 일삼은 인물들로 악평하면서 그 역사적 자취를 폄하하고자 했다.
그러나 제나라는 이정기를 대표로 하는 고구려인에 의해 세워지고, 고구려 유민들이 주축이 되어 55년 동안 강력하게 당나라에 저항했던 ‘중국 내의 고구려’였음은 분명하다.
또한 당나라의 제나라 공격에 동원된 신라 군사 3만 명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산동지역에 잔류하는 것을 계기로, 이후 신라방과 발해관의 역할이 더욱 증대되었음도 사실이다. 이후 신라인 장보고가 동북아 해상 네트워크를 장악한 것 역시 그 이전 이미 고구려 유민 이정기 일가의 지배체제가 낳은 결과물이었다.
저자는 이런 이정기 일가와 제나라의 역사 복원작업이 그동안 중국사 속에서, 사마광(司馬光)을 비롯한 중국역사가들에 의해 왜곡되고 은폐되었으며, 우리 역사 속에서도 잊혀져왔던 ‘고구려 유민의 나라’의 실체를 드러냄으로써, 그 정당한 역사적 권리를 획득하는 데 기반이 될 것이라 여긴다. 아울러 고조선-고구려-발해사 등을 ‘동북공정’이란 미명 하에 중국사 속의 ‘지방정권사’로 규정하려는 현재 중국의 중화패권주의 역사상에 카운터펀치를 먹이고 그에 대항할 수 있는 유력한 ‘비장의 무기’가 될 수 있음도 피력한다.
‘중국 속의 고구려’ 제나라의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고 계속되는 ‘역사전쟁’에 어떻게 반영할지는 이제 우리들의 몫이다.
목차
책 머리에
제1장 고구려 유민 이정기의 산동 지배과정
1. 이정기의 출현
2. 이정기의 청년시절
3. 이정기의 평로·치청절도사 이전 시절
4. 이정기의 평로·치청절도사 시절
5. 요양군왕 이정기의 독립국화
6. 이정기에 대한 평가
제2장 고구려 유민 이정기의 아들 이납의 발자취
1. 고구려 유민 이납의 정체성
2. 이납의 유년시절
3. 이납과 당의 대립기
4. 제왕 이납의 독립기
5. 평로·치청절도사 이납과 당의 공존 모색 시기
6. 이납과 당의 공존시기
7. 제나라 이납의 평가
제3장 이납의 아들 이사고에 의한 제나라의 전성기
1. 제나라 이사고의 등장
2. 이납 생전 이사고의 관직
3. 이사고의 절도사 세습
4. 해운육운압신라발해양번등사 이사고와 외국관계
5. 이사고의 영역 관리 능력
6. 덕종 붕어와 이사고의 대응 방법
7. 이사고와 오소성과의 교역
8. 이사고가 시중이 된 시점
9. 이사고의 치적과 유오의 등장
제4장 이사고의 아우 이사도에 의한 제국화
1. 고구려와 제 역사
2. 이사고의 유언
3. 이사도의 즉위와 당의 추인
4. 육운해운압신라발해양번등사 이사도와 신라관계
5. 육운해운압신라발해양번등사 이사도와 발해관계
6. 이사도 국가와 당의 공존 모색시기
7. 제국화를 위한 낙양 함락 작전
8. 제국 도약을 위한 정지 작업
9. 제와 당과 공존 모색 시기
제5장 제나라 멸망과 당 사가들의 악평
1. 당 총공세로 이사도의 제나라 전선 동요
2. 제 도지병마사 유오의 반란
3. 이사도의 최후 광경
4. 『신당서』 「오행지」에 나타난 이사도 멸망과 관련된 기사
5. 제나라 멸망 후 당의 대응책
6. 당이 제나라를 평정하기 위해 이용한 심리전술
7. 이사도 사후 제나라에 대한 분할 지배
8. 최군이 작성한 비문에 나타난 제나라에 대한 혹평
9. 제 멸망 후 이정기 일문에 대한 사가들의 악평
10. 결론
부록|연표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