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이나 버스 안, 그리고 커피숍에서도 사람들은 제각기 무언가를 읽거나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십 수 년 전의 소설·시와 같은 문학 작품들이 인쇄되어 있는 책이나 신문을 봤을 것이다. 지금 사람들의 시선은 대개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PC의 컬러 액정을 향해 있다. 우리들의 눈과 손에서 멀어진 문학은 이렇게 사라져가는 것일까?
화려한 미디어 시대에 문학의 운명을 다룬 『근대 서사 텍스트와 미디어 테크놀로지』
문학평론가이자 서강대 국문과 최성민 대우교수가 펴낸 『근대 서사 텍스트와 미디어 테크놀로지』(소명출판, 2012)는 엄청난 속도로 미디어가 등장하고 변화하는 시대에 문학이 어떤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인가에 대한 자문의 소산이다. 최 교수는 이 책에서 ‘문학’이라는 개념이 근대적 학문 제도의 영향과 인쇄 기술의 발달이 더불어 진행되면서 인쇄된 ‘문자(文字)’에 고정되었다는 근본적 지적을 잊지 않는다. 문학 위기론은 문학이 종이 위의 문자를 통해서만 소통된다는 시대착오적 판단에서 비롯된 것으로, 근대적 문학 개념을 해체하고 재구성해야만 문학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진단한다. 영화를 모니터로, 음악을 파일로 감상하는 시대에 문학이 종이 위에만 머물 이유는 없다는 시비를 거는 것이다.
『근대서사 텍스트와 미디어 테크놀로지』를 통해 기존의 ‘문학’과 ‘신매체’ 개념을 새롭게 규정
저자는 문학 개념을 해체한 뒤, ‘서사 텍스트’라는 표현으로 대체할 것을 주장한다. 기존의 문학 개념을 ‘서사 텍스트’라는 개념으로 대체함으로써, 소설과 영화, 심지어 디지털 게임까지도 미디어 테크놀로지의 발달이라는 하나의 흐름 속에서 일관된 매체 변화 양상으로 정리하는 관점을 제시한다. 사실 이런 논의는 새로운 것은 아니다. 문학 대체재로서 산발적 논의는 있었지만 근대적 개념의 문학으로부터 지금 여기 이후를 본격적으로 따지고 있는 것이야 말로 이 책이 미덕이다. 근대 이후 등장한 신문, 잡지, 딱지본과 같은 인쇄 매체들은 물론이고, 연극, 영화, 방송, 인터넷 등과 같은 미디어들은 각 시대의 첨단 미디어 테크놀로지의 산물들이며, 인간의 본능적인 서사적 욕망은 이 테크놀로지를 이용하여 자신의 생각과 감정, 그리고 이야기를 전달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또한 ‘뉴 미디어’, 즉 ‘신매체’의 개념도 새롭게 규정한다. 뉴 미디어라고 하면 모바일 인터넷 기기와 같은 첨단 디지털 기기를 흔히 떠올리곤 하지만, 20세기 초에는 신문도 ‘뉴 미디어’였다는 것이다. 이 책은 20세기 이후 등장한 각각의 뉴 미디어들, 즉 신문, 잡지, 연극, 영화, 방송, 인터넷 등이 기존의 서사들을 어떻게 담아냈는가를 구체적인 자료에 근거하여 설명한다. 가령 우리나라에서 1920년대에 시작된 라디오 방송은 초기에 정치적 프로파간다의 역할에 중점을 두었지만, 점차 문학 강연, 향토극, 무사극 등과 같은 서사적 텍스트들을 포함하기 시작했음을 당시의 방송 편성표와 신문 보도 내용을 통해 입증하는 식이다.
이에 『근대 서사 텍스트와 미디어 테크놀로지』는 당대의 뉴 미디어들은 기존의 미디어를 통해 소통되던 서사를 ‘재매개’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소통 영역을 확보하기 시작한다고 주장한다. ‘재매개’는 제이 데이비드 볼터와 리처드 그루신에 의해 대두된 용어인데, 최 교수는 이 개념이 근대 이후 서사 텍스트의 역사를 집약적으로 드러내는 개념이라고 인식한다.
서사 텍스트들은 어떤 이유에서 뉴 미디어들과 결합하게 되는 것일까? 저자는 『근대 서사 텍스트와 미디어 테크놀로지』의 ‘보론’을 통해 “은유의 매개와 서사의 매체”에서 발신자와 수신자의 사고를 가장 손실 없이 담아내고 이동시키기 위해 뉴 미디어들이 끊임없이 등장하게 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렇게 등장한 뉴 미디어들은 기존의 미디어와 서사 텍스트들을 끊임없이 참조하며 발전해온 것이라고 말한다. 가령 고대 파피루스의 두루마리 형태가 현재 인터넷 브라우저들의 ‘스크롤’ 방식과 맞닿아 있다는 것이나, 최근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PC의 인터페이스가 기존의 책장 넘기는 방식을 최대한 흉내 내기 위해 발전해오고 있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또한 ‘보론’에 실린 “테크놀로지와 서사적 리얼리티 연구”라는 글을 통해 디지털 게임이 어떻게 사람들의 서사적 욕망을 채워나갈 수 있었는가에 대한 해답을 ‘리얼리티’의 구현 양상에서 발견할 수 있다. 시간적 리얼리티, 공간적 리얼리티, 행위적 리얼리티, 데이터 리얼리티, 변화의 리얼리티, 이상의 다섯 가지 측면의 리얼리티를 통해 디지털 게임이 인간의 삶과 현실을 모방하는 서사적 힘을 얻게 되었다고 분석한다.
미디어 테크놀로지 안에서도 오고 가는 것은 언제나 ‘서사’와 ‘이야기’
최성민 교수에게 급속도로 변화하는 미디어 환경의 미래에 대해 질문을 던져 보았다. 최 교수는 “미디어 테크놀로지는 오늘날 예측불허의 속도로 빠르게 진보하고 있는 분야”라면서 “이는 소통, 즉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욕망과 담론이 그 어느 때보다 뜨겁기 때문에 인간이 가진 모든 역량이 집결된 결과”라고 말한다. 하지만 “결국 그 안에서 오고 가는 것은 언제나 ‘서사’와 ‘스토리’들”이었기 때문에 “지금의 변화에 대한 반작용으로, 인간에 대한 진지한 성찰의 중요성이 다시금 대두되기 시작하면서 조만간 그 속도는 점차 늦춰지게 될 것”이라는 답을 제시했다. 더불어 그는, “본격적으로 이용한 지 5년도 안된 SNS에 벌써부터 피로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 그 증거”라면서, 변화의 속도나 현상 그 자체보다 변화의 요인을 주목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곁들였다.
목차
차 례
책머리에
제1부 근대 서사 텍스트와 미디어의 관계
제1장_ 서론
1. 연구목적
2. 연구사 검토
3. 연구의 범위와 방법
제2장_ 서사 텍스트의 재매개 방식과 소통
1. ‘문자성(文字性)’의 고정(固定)과 근대적 ‘문학’ 개념의 형성
1) 독서 양식의 변화와 학문적 제도의 관습
2) 근대 ‘문학’ 개념의 편협성과 그 극복의 필요성
3) 대중적 상품으로서의 서사 텍스트
2. 서사의 재매개와 서사 텍스트의 수사학적 구성
1) 서사의 재매개 역학
2) 재매개를 통한 서사 텍스트 장르의 수사학적 구성
3) 춘향 서사의 재매개 양상
제3장_ 신매체의 등장과 근대 서사 텍스트의 대중적 소통 양상
1. ‘신문’의 등장과 활자 중심 문학의 확립
1) 근대 전환기 ‘신문’의 등장과 역할
2) 사건과 발화의 재매개와 ‘기자(記者)’의 서사
3) 저널리즘과 상업성의 문학
2. ‘잡지’ 및 ‘단행본’의 유통과 문학 독자의 형성
1) 딱지본 및 단행본의 유통과 ‘동인지’ 및 ‘문예지’의 등장
2) 묘사의 재매개와 전문 문인(專門文人)의 서사
3) 예술로서의 문학의 확립과 상품으로서의 문학의 소비
3. ‘연극’ 및 ‘영화’의 등장과 서사 관객의 형성
1) 근대 연극?영화의 형성기와 서사의 조직적 생산
2) 서사의 영상적(映像的) 재매개
3) 문학과의 영향 관계와 대중적 관객의 형성
4. 전파?전자 매체의 등장과 다감각 시대의 서사
1) 전파?전자 매체의 발전과 서사의 사적(私的) 재구성
2) 청각적 재매개로의 복귀와 다감각적 재매개
3) 테크놀로지를 통한 새로운 서사 문학의 소통과 재생산
제4장_ 결론:재매개의 투명화와 반성화
제2부 보론
보론 1_ 은유의 매개와 서사의 매체
1. 개념적 은유:은유에 대한 확장적 이해
2. 텍스트의 은유:폴 리쾨르의 서사 이론과 해석 이론
3. 매체의 은유:서사, 텍스트와 신매체
4. 결론
보론 2_ 테크놀로지와 서사적 리얼리티 연구
1. 서론
2. 문자(文字) 이후의 서사적 커뮤니케이션
3. 서사의 본능과 매체의 리얼리티
4. 디지털 게임의 특성과 유형 분류 양상
5. 디지털 게임의 가능 세계와 리얼리티 유형
6. 결론
l 참고문헌 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