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주의와 냉전이 만들어낸 ‘위도’를 돌파하고자 한재일조선인 작가들의 언어, 연대, 장소
‘보는 주체=식민자’, ‘보이는 대상=피식민자’라는 이항대립의 원칙적 종언을 뜻하는 제국 붕괴 후, 재일조선인 작가들은 어떻게 ‘관찰하는 사람이자 관찰되는 사람’으로서 스스로의 타자성을 재현하였을까? 이 질문의 유의미한 답을 도출하기 위해 필요한 작업은 아마도, 조선어와 일본어를 넘나들고, 향수와 생활세계 그리고 사상적 귀속처 사이에서 유동하며 전후 일본과 분단된 조국, 그 사이의 다양한 ‘연대’ 네트워크에 접속하며 ‘재일(성)’의 안팎을 들여다보았던 작가들의 모순적 조건들을 가시화하는 일일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세계는 냉전이라는 ‘안정’된 긴장 관계의 유지를 위해 국민국가 단위로 재배열되는 과정을 거쳤으며, 그러한 새로운 질서는 단일언어ㆍ단일민족주의를 통해 국민국가의 수립을 앞당길 수 있다는 믿음을 전파했다. 전후 일본에서는 다민족ㆍ다언어 집단에 대한 제국 일본의 위계화된 지배와 통치, 그리고 이로부터 이념적 정당성을 부여받은 전쟁의 기억이 급격히 망각되고 있었다. 그와 같은 전후 일본에서, 단일언어ㆍ단일민족이란 식민주의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위기’의 기제이자, 한편으로는 전쟁 책임을 서둘러 망각하도록 하는 알리바이였던 셈이다. 식민지 조선에서 출생하여 다양한 루트로 일본에 건너가 조선어와 일본어에 걸친 채로 글을 썼던 조선인 작가들은 이렇게 단일언어ㆍ단일민족주의라는 이데올로기로 재편된 ‘전후’ 일본에 남겨졌다. 하지만 전후 일본은 또 다른 의미에서의 위계적인 다언어ㆍ다민족 국가였음을 증언하는 것이 바로 재일조선인의 언어와 존재 상태였다. 그렇다면 식민지 시기의 글쓰기로부터 제국 붕괴 후 ‘재일조선인 글쓰기’를 변별할 수 있는 요건이란 무엇보다 그 언어적ㆍ존재론적 조건에서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이른바 ‘재일조선인 서사’의 문법과 그것의 담론적 효과를 살피기 위하여 ‘이언어(biliteracy)’와 ‘귀환하지 않음’이라는 조건이 어떻게 글쓰기의 장치로서 기능했는지 탐색하는 한편, 해방 후 한반도와 일본 사이에서 단일하지 않은 ‘재일’의 경계들이 구성되는 장면들을 계보학적으로 재구성한 결과물이다. 이를 위해, 재일 문학이 제국 붕괴 후 복합적이고 비대칭적인 관계 질서에 얽혀 있는 존재들에 관해 축적해 온 세부적이고 다면적인 앎의 형태들에 접근하고 있다. 흔히 재일조선인의 역사는 남북일이라는 세 개의 국가 혹은 체제 사이에서 요동쳐온 역사로 표상되어 왔지만, 이 책은 실제 그들의 텍스트가 이른바 ‘남북일 냉전 구조’ 속의 중층적 언어와 장소, 양식과 생산 시스템 사이에서 쓰이고 이동하고 읽혀온 과정을 조명한다. 그것은 재일조선인의 글쓰기가 ‘계속되는 식민주의’ 내지 ‘신식민주의’적인 냉전 질서 속에서, 다언어ㆍ다민족 독서공동체나 정치적 연합체 같은 다양한 사회적 장에 연루되었던 시공간을 조명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다루는 작가들 중 대다수는 식민지 조선에서 출생하여 유소년기를 보내고, 환경은 조금씩 다르지만 제국/식민지적 교육 시스템 속에서 이언어를 습득했다. 그들 대부분은 전후 일본에서 조선어와 일본어 양쪽으로 글을 쓴 경험이 있고, 또한 일부는 실제 ‘고향’과 사상적 귀속처로서의 ‘고국’이 불일치하는 가운데 귀환이나 ‘귀국’에 대해 썼다. 이처럼 향수의 대상과 충성의 대상 사이에서 유동하며 복잡한 존재적 위상을 만들어간 재일조선인 글쓰기의 특징을, 이 책은 비균질적인 언어의 형식적 혼종성과 강렬한 민족주의의 내용적 동종성, 그리고 국경의 초월과 민족적 통합 사이의 모순으로 집약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책의 제목인 ‘디아스포라의 위도’란 재일 시인 김시종이 그토록 ‘숙명적’으로 넘고자 했으나 동시에 ‘불길함’을 감지하기도 했던 ‘일본 안의 38선’을 말한다. 재일조선인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 이 ‘일본 안의 38선’이라는 표현은 다양한 함의를 갖는다. 1945년 8월 미국과 소련이 ‘조국’을 남북으로 분할하기 위해 선택한 좌표축이자, 재일 사회 내부의 셀 수 없는 대립과 연합을 낳은 사상적 경계였으며, 한편으론 1959년 현실화된 ‘귀국’의 출발지를 지리적으로 관통하는 선이기도 했다. 남북한 사이의 이동을 가로막은 위도가 누군가에게는 그동안 불가능했던 ‘조국’으로의 월경을 가능하게 해준 입구가 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불길한’ 사상적 억압이기도 했음을 김시종은 증언한다. 현재는 ‘귀국’ 사업 이면의 국가적 모의가 밝혀지는 한편, 귀국자 출신의 북한 이탈주민이나 점차 그 수가 줄어들고 있는 잔류자나 일본인 아내 등 여전히 불가시적인 존재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요구가 들려온다. 또한 조선적(朝鮮籍) 재일동포에 대한 대한민국 국가기관의 입국 통제 사실에서도 드러나듯이, 실로 디아스포라의 위도‘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들의 신체 위에 교차하고 있다. 다시금 위도의 ‘숙명’과 ‘불길함’을 동시에 간파한 재일 작가들의 상상과 실천을 돌아보고, 그 재현의 임계를 직시해야 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