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이 대상으로 하는 시기는 조선후기 18세기이래, 19세기말 대한제국기를 거쳐 일제 강점 초기인 1910년대에 이르기까지이다. 저자의 연구 목표는 농업사회의 두 개의 축, 즉 지주와 농민들이 소유토지에 대한 등재를 둘러싸고 어떻게 대립하며 싸웠으며, 또한 이들이 토지장부에 등재하여 자신의 권리를 어떻게 지키려고 했는지를 살펴보려는 것이다.
이 책은 19세기 조선농촌사회에서 지주?농민들의 토지소유권 확립과 소유권 등재를 위한 노력이 조선말기 국가의 체제 내에서 어떻게 반영되며 제도적 변화를 일으켰는가를 살펴본 것이다. 주요 자료로서 18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이르는 조선, 혹은 대한제국기 양안(量案)을 대상으로 하였다.
이 책에서는 조선농촌사회에서 토지소유와 경영을 둘러싼 두 축, 즉 지주와 작인의 양자에 입각하여 전개된 토지에 대한 권리를 둘러싼 대립 과정을 보려고 하였으며 이러한 갈등과 대립이 결국 한국 근대 토지제도의 형성의 특질이라는 점을 밝히려 하였다.
우선 제1부에서는 ‘18~19세기 조선사회 양전의 실시와 등록 제도의 변화’를 다루었다. 18세기 말 충청도 회인현 양안에서 경자양안 이후 토지소유권 의식의 성장을 반영하는 가운데, 현실의 소유자명인 시주명을 등재시켰다면, 19세기 후반 온양군 양안에서는 소유자뿐만 아니라 경영자인 작인의 등록도 함께 이루어졌으며, 이후 대한제국시기 광무양전?지계사업에서는 현실의 토지소유자를 지칭하는 시주(時主)와 더불어 시작(時作)의 용어가 정식으로 양안상에 등재되는 과정이었음을 확인하였다. 이는 조선후기에 전개된 현실의 토지소유자의 권리가 점차 강화되는 추세에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이었으며, 동시에 현실 농업경영자인 작인의 권리도 함께 성장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 19세기 후반 전라도 명례궁장토의 사례에서 토지집적은 양반토호나 서민지주에게서도 일어나고 있었고 또한 봉건권력을 배경으로 왕실에 의해 추진되고 있음을 밝혔다. 반면 농민들은 명례궁에 대한 항조투쟁과 부세의 가혹한 수탈에 반대하면서 민란을 일으켰다. 특히 흥덕 일대 5개 군의 명례궁장토 문제는 전라도 북부 7개 군의 민전수도와 결합되면서 1894년 농민전쟁시 이 지역 최대의 토지문제로 대두되었다. 이때 농민들은 토지소유권의 확립과 농업경영의 안정을 위협하는 국가와 궁방의 제침탈을 방지하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농민전쟁에서 농민들의 요구는 2차 봉기의 실패로 인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제2부에서는 ‘대한제국기 광무양전사업과 지주?농민의 변화’를 검토하였다.
1898년부터 1904년까지 추진한 광무양전?지계사업은 근대적인 토지제도와 지세제도를 수립하고자 하는 목표아래 전국가적인 차원에서 추진되었다. 이 사업은 양지아문이 주도한 양전사업과 지계아문의 양전?관계발급사업으로 전개되었다. 대한제국시기 양전?지계사업이 일제의 조선토지조사사업과 대비되는 점은 일본인 등 외국인의 토지소유를 허용하지 않았으며, 소작농의 제권리를 일정하게 보호하려는 정책을 취했던 것이었다. 이로 인하여 대한제국의 토지개혁정책이 본래 의도한 바대로 근대적 토지소유제도의 확립과 외국인의 토지침탈 방지정책을 수행되었다면, 최종적으로 한국의 주체적인 근대화를 위해 토지제도의 개혁사업을 완수하려고 하였을 것이라는 점을 재확인하였다.
아울러 경기도 및 강원도 각 지역 양안상에 나타난 토지소유자와 경작자의 분화 상황을 분석하여 대지주는 대토지소유를 확대하고 있었고, 반면 자영농민층이 어느 정도 확보되어 있지만, 대부분은 영세소농과 무전농민이 크게 양산되어 있는 상태를 확인하였다. 또 지계아문의 양안에 등재되어 있는 ‘시주’의 실체에 대해 검토하였는데, 지계아문의 지계사업에 대응하여 당시 인민들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토지의 소유권을 확인받기 위해서 보다 적극적으로 양안에 ‘시주’로서 등장시키려 했음을 파악했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양전사업과 관계발급사업은 더 이상 실시되지 못하고 중단되고 말았다. 따라서 대한제국이 추구하는 근대적 토지소유제도의 수립과 외국인 토지침탈 금지정책은 미완의 과제로 남게 되었다.
제3부에서는 ‘1905년 이후 일제의 토지조사 추진과 토지소유자의 변화’라는 주제로 ‘한성부 통표’를 통해서 한성부의 토지 가옥 거래에 관한 관리제도를 분석했다. 통표 분석 결과, 각 지역의 토지 가옥 거래의 양상은 1906년 하반기에 집중적으로 나타나 1910~11년까지 확대일로에 있었고, 한국인과 일본인의 거주 지역에 따라 거래 양상이 달랐고, 남서지역에서는 시간이 흐를수록 한국인과의 거래를 넘어 일본인끼리 거래가 증가하는 경향을 보였다. 한성부에 거주하는 상당수 한국인들은 일본인 지주들에게 토지와 가옥을 내주어야 했고, 많은 빈민들은 한성부 교외 지역으로 나가 살아야 했다.
일제는 1910년 8월 대한제국의 강제 병합 이전에 이미 전국적인 토지조사사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1910년 1월 이후 8개년에 걸쳐서 시행할 예정으로 토지조사계획을 수립하였다. 1910년 8월 마침내 일제가 한국을 식민지로 강점하자마자 본래 계획을 수정하여 실행에 옮겼다. 8월 22일 ‘한국병합조약’을 체결한 지 하루만인 8월 23일 ‘토지조사법’을 공포하였다. 토지조사의 첫 대상지는 경기도와 경상북도였다. 조선토지조사사업은 지주의 배타적인 소유권을 확정하는 차원에서 추진하였다. 토지조사사업은 토지소유권의 조사를 위해 준비조사, 일필지조사, 분쟁지조사라는 3단계로 진행되었다. 광무양안시 토지소유 분화와 비교하여 1910년대 일본 식민지하 농촌경제에서는 지주와 자작, 소작, 자소작 농민층의 분해 경향은 더욱 확대되었다. 식민지 지주제의 확대는 농촌사회의 불안정과 지주 소작인의 갈등으로 치달아 결국 식민지 농업정책의 파탄을 가져오고 장기적으로 식민지 지배구조의 붕괴를 초래하고 있었다. 이로써 일본 식민지하 조선농촌에서는 근대적 토지제도의 형성과 식민지 지주제와의 모순구조로 들어서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상의 분석을 통하여 저자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는다. “일본의 식민지 토지조사사업 추진은 이전 한국의 근대적 토지제도 형성과정과 배치되는 방향이었다. 일본은 조선후기 토지소유권의 발달과 더불어 성장하고 있었던 농민들의 제권리를 배제하였으며, 또한 토지소유권과 경작권의 증명제도에서 등기제도로의 단계적인 발전이라는 대한제국의 근대적 토지제도 수립과정을 중단시키고 식민지의 토지제도로의 전환을 강요하였다. 일제 식민지로부터 해방이라는 역사적 과제는 결국 식민지 토지제도의 편향된 소유제도와 식민지 지주제를 그 자체로 청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또한 최근 일본 검정교과서의 역사왜곡과 관련하여 일본과 한국의 고등학교 교과서에 나타난 일제의 토지조사사업과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해 다루었다. 지금까지 식민지 토대 구축을 위한 토지조사사업의 역사적 성격을 규정할 때, 근대사의 발전과정으로만 해석할 것이 아니라 결국 파멸할 수밖에 없는 일본제국주의라는 준엄한 역사인식과 더불어, 더 이상 고통받아온 민중의 삶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는 역사비판의식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하면서 역사교육의 중요성을 재삼 강조하고 있다.
이 책은 조선후기에서 대한제국 말까지 만들어진 각종 양안(量案) 자료의 내용과 지주·작인의 등재 내용을 면밀하게 검토하여 실증적인 차원에서 토지소유자와 작인의 성격을 추적한 것이다. 이에 따라 경제사연구의 일각에서 주장하는 토지조사사업에 의한 사적 토지소유제도의 확립과 식민지 지주제의 성립을 비판하면서, 조선후기이래 변화하는 양안 등재 기록의 실증적 분석을 통해 근대 토지제도의 형성과정의 특질을 밝혔다는 데 의미가 있다.
목차
머리말
제1부, 18~19세기 조선 양전사업의 변화와 토지문제
1장. 18세기 후반 양전사업의 변화와 ‘시주(時主)’의 성격
2장. 19세기 후반 충청도 온양군 동상면 양안과 지주·농민층의 추이
3장. 19세기말 호남지역 지주제의 확대와 토지문제
[보설 1] 19세기 지주제의 변화와 궁장토내의 농민층 분화 양상 비평
제2부, 대한제국기 광무양전사업과 지주·농민의 변화
4장. 대한제국기 양전·지계사업 연구와 양안 자료의 활용
5장. 경기도 지역 광무 양전사업의 추진과 농민층 분화
6장. 대한제국기 지계아문의 강원도 양전사업과 관계(官契) 발급
제3부, 1905년 이후 일제의 토지조사사업과 토지소유자의 변화
7장. 한말 한성부 지역 토지 가옥 거래의 추이와 거주지별 편차
8장. 일제하 토지 조사·장부 체계와 파악 방식의 변화
-안산군 월곡면 월암동 토지 장부와 주민의 대응-
9장. 일제의 토지조사사업 실시와 경기 지역 지주제의 재편
맺음말
[보설 2] 일제 식민지 토지조사와 한·일 역사교과서 서술 비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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