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근대문학이라 부르는 것은 누구에 의해 생산되고 어디에서 유통되며 어떻게 전승되었는가? 이야기는 언제 책이 되고, 책에는 무슨 이야기가 숨어 있는가? [책의 탄생과 이야기의 운명](소명출판, 2013)은 소설이나 문학 등 텍스트가 아닌, 텍스트 주변이자 바깥 이야기를 주목한 책이다. 이 책은 초창기의 출판사와 서점, 편집자와 출판인, 저작권과 판권을 실증적으로 추적하는 한편 책이라는 실체 뒤에 가려져 왔던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저자는 다채로운 이야기 양식이 근대적인 출판물의 형태로 탄생되고 소비된 역사적 과정을 통해 근대문학사의 이면을 새로운 시각에서 조명할 수 있다고 말한다.
책의 구성을 살펴보면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거나 접하기 어려운 희귀 서적과 판본을 세심하게 고증하여 다양한 사진과 함께 공개하고, 근대 초창기의 주요 서점과 1920~1930년대 출판문화를 선도한 명문 출판사 사옥과 로고 등 귀중한 자료를 찾아내 권두 화보로 실었다. 각 부의 끝자락에 실린 ‘갈피짬’은 편집자와 출판사의 일대기를 재구성한 약전, 신소설 출판물을 전수 조사해서 정리하고 숨은 문제점을 지적한 글, 정본 복원과 사전 편찬이 지닌 현재적 의의와 가치를 다룬 글로, 색다르고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치밀한 자료 고증과 객관적인 재검토
이 책은 근대문학사의 출발점이자 충분히 연구되었다고 여겨져 온 최남선과 신문관의 출판 활동, 이광수의 ?무정?, 이해조의 신소설, 이수일과 심순애 이야기를 통해 초창기 출판계의 실상과 구체적인 출판물을 전면 재평가했다. 우선 근대적인 미디어 자본이자 문화 기술 인프라인 신문관의 창립 경위와 운영 양상을 세밀하게 검증하고 그동안 공개되지 않은 어린이 잡지, 번역 동화, 문장 앤솔러지가 지닌 문제성을 새롭게 포착했다. 또한 근대 최초의 이야기꾼인 이해조의 신소설과 근대문학의 효시로 일컬어지는 이광수의 ?무정? 판권이 이동한 경로를 다면적으로 추적하고, 대중적으로 가장 널리 파급된 ?장한몽?이 겪은 문화사의 굴곡을 계보학적으로 재구성했다. 이렇게 초창기의 출판계 풍경, 출판물의 생산과 유통, 책이라는 문화 상품과 이야기 양식의 상관성에 주목함으로써 근대문학의 역사성을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재조명했다.
근대문학사 연구 방법론에 대한 반성과 도전
이 책은 철저한 자료 조사와 검증에서 출발했다. 근대문학사 연구에서 실증적인 기초 자료 발굴, 정본 출판, 사전 편찬과 같은 인문학적 연구 토대를 확립하는 작업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이는 새로운 연구 진로와 방법론을 개척하기 위한 저자의 모색인 동시에 학계를 향한 제안이기도 하다. 그리고 근대 초창기 문학에 대한 연구사와 임화의 문학사 서술에 대한 점검을 통해 근대문학사 연구 방법론에 대한 고민을 담은 글, 유다른 역사를 상상한 이야기이면서도 근대문학사 연구에서 소외되고 만 최인훈의 소설을 다시 읽은 글을 엮었다. 소소해 보이지만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사실에 집중함으로써 관성적인 태도와 제한된 연구 지평을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이 오래전에 발표된 논문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저자의 시각이다.
책과 이야기의 역동적인 운명
이 책의 전반부에서 각각 출판 주체와 출판물에 대한 실증, 저작권과 판권의 이동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후반부에서는 기초 자료에 대한 엄밀한 접근과 체계적인 정리를 통해 새로운 연구 기틀을 마련하기 위한 전망을 담았다.
근대문학은 작가와 텍스트에 의해서만 성립되지 않는다. 편집?인쇄?출판?광고?유통?소비의 전 과정에서 다양한 주체의 목소리가 개입되며 활자?종이?잉크?디자인?삽화?장정의 기술력이 종합되어 한 편의 이야기가 태어나고 한 권의 책으로 떠돌아다닐 수 있다. 이야기는 ‘책’을 통해 비로소 ‘운명’을 얻게 되며, 책은 ‘이야기’를 따라 자신의 ‘역사’를 갖는다. 작가와 텍스트를 둘러싼 역사적 조건과 물질적 과정을 깊이 파고든 ?책의 탄생과 이야기의 운명?은 작가와 텍스트 연구만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근대문학의 역사성과 숨은 구조를 드러내면서 책과 이야기가 살아 숨 쉬는 양상을 생생하게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