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학교 근대한국학연구소가 국내 최초로 일제 말기 프로파간다 영화 '콜링 오스트레일리아!' 등을 포함한 허영의 작품 3편을 공개한다. 연구소는 27~28일 양일에 걸쳐 미래캠퍼스에서 영화상영회와 좌담, 강연 등의 행사를 갖는다.
조선인 영화감독 허영(1908-52)이 만든 일제 프로파간다 영화 '콜링 오스트레일리아!(Calling Australia!)'(1943추정)가 발견됐다. 이 작품은 오랫동안 관련 연구자들 사이에서 영화 제작 사실만 전해지다가, 김한상 교수의 노력에 의해 소재가 확인됐고, 연구소가 호주국립영상음향아카이브로부터 실물을 확보하게 됐다.
허영과 그의 작품 '콜링 오스트레일리아!'는 한국근현대사와 한국영화사에서 매우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허영은 조선인으로 태어났지만 히나츠 에이타로라는 일본 이름을 쓰고 일본어를 사용하며 상당 기간 조선인 정체성을 숨기고 살았다. 제국의 일원으로서 제국과 혼연일체가 되고자 했으나, 조선인으로 태어난 사실이 발각되면서 온전한 일본인으로서의 삶을 포기해야 했다. 그 이후 조선으로 돌아와 만든 '그대와 나'(1941)는 그가 조선인 정체성을 가지고 만든 영화였지만 흥행에 실패한다.
이번 행사를 통해 국내에서 최초로 공개되는 '콜링 오스트레일리아!'는 허영이 인도네시아 자바에 일본군 군속으로 가서 만든 선전영화이다. 호주의 대동아공영권 참여를 독려하면서 일본군 휘하 호주군 포로들의 풍요로운 삶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실제 포로들의 비참한 현실을 은폐한 '조작'으로 악명을 얻었다. 일본군 소속의 조선영화인이 감독하고 출연자의 대부분이 호주, 네덜란드, 영국 출신의 백인이며 대사의 대부분이 영어로 됐다. 이 작품은 한국영화사의 단선적 역사기술에 균열을 일으킨다.
허영은 일제 패망 후에 일본으로도 한국으로도 귀환하지 못하고서 '후융'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가지고 인도네시아의 독립운동에 헌신하는 것으로 자신의 삶을 마무리 지었다. 허영의 삶과 '콜링 오스트레일리아!'는 해방이후 국민국가의 민족 서사에서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오욕의 과거이자, 일본제국의 영화사에서 보더라도 주변부의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호주국립영상음향아카이브가 적군의 노획자료로 처음 입수한 뒤 1986년에 대외 공개됐,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지금에야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영화는 제국과의 일체화의 예정된 실패, '대동아'라는 범세계주의적 지향 속에 실재하던 인종 정치, 그리고 미국을 극복한 대동아적 백인 유토피아를 구현하기 위해 연출된 '기묘한' 풍요의 이미지들을 담고 있다. 이는 우리에게 단순히 어느 실패한 친일 부역자의 삶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제국과 인종의 위계를 실감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또한 연구소는 '콜링 오스트레일리아!'에 출연한 일본군 포로들이 일제 패망 이후 당시 조작 정황을 증언한 메타 영화 '일본 제공'과 1986년 이 영화들이 처음 공개된 이후 영화 촬영과 제작 과정을 취재한 다큐멘터리 영화 '프로파간다의 포로들'을 함께 발굴, 이번 영화상영회를 통해 함께 선보인다.